테니스 대회는 세계적으로 ITF가 관장하는 대회와 ATP와 WTA가 관장하는 투어 대회로 구성 된다. ITF가 관장하는 대회로는 4대 그랜드 슬램
대회, 데이비스컵대회(
www.daviscup.com), 페드컵대회가 있다.
4대 그랜드 슬램 대회는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이며 상금 액수와 참가 선수 규모 면에서 최고 권위의 대회이다.
데이비스컵은 매해 열리는 남자 국가 대항전이며 페드컵은 여자 국가 대항전이다. ATP와 WTA의 투어 대회는 1년 일정으로 열리고 있다.
남자대회
1) 그랜드 슬램 대회
그랜드 슬램 대회는 호주오픈(호주 멜버른), 프랑스오픈(프랑스 파리), 윔블던(영국 윔블던), US오픈(미국 뉴욕)을 말한다. 테니스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4대 그랜드 슬램 대회는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ITF 그랜드슬램대회 위원회에 의해 공표된 그랜드슬램대회 규정에 따라 개최
된다.
그랜드 슬램 대회는 다른 대회와는 달리 남녀 단식과 복식 외에 혼합복식 경기가 추가되며 상금액이 미리 지정되지 않는다.
상금은 전년도 대비 매년 인상되며 대회 개최 전 각 대회 조직위원회가 그 해의 상금액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대회 참가 신청과 벌금이 부과되지 않는 기권은 각 대회 본선이 시작되는 월요일의 42일 전까지 해야 한다. 각 대회는 그랜드 슬램 대회위원회가 특별히 승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식의 경우 예선, 본선 모두 128드로, 복식 본선은 64드로로 진행하며 복식 예선을 실시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는다. ITF는 그랜드슬램대회의 권위를 높이고 ATP 투어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지난 1990년 말에 그랜드슬램컵대회를 창설하였다.
① 호주오픈(www.ausopen.org)

매 해 1월 중순 쯤 개최되는 호주오픈은 1905년 멜버른 인근 쿠용의 잔디코트에서 시작되었으나 83년만인 1988년, 야라강변의 호주국립테니스센터로 개최지를 변경했다. 코트 표면도 잔디코트에서 하드코트로 변화되었다.
1916년부터 1918년, 1941년부터 1945년, 1986년에는 2차 대전 등 국제적 변란으로 인해 대회가 열리지 못했다.
프로 선수들에게도 출전 기회가 주어진 1969년에는 로드 레이버가 우승했으며 그는 이 해에 4대 그랜드 슬램 대회를 우승해 그랜드 슬래머의 명예를 얻었다.
1933년 양손 백핸드가 처음 선을 보였다.
최근에는 양손 백핸드가 보편적인 기술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시드니 출신인 17세의 비비안 맥그래스는 8강전에서 위력적인 백핸드를 이용해 당시 세계 랭킹 1위 엘스워스 바인즈를 꺾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한 때 새로운 기술로 세계 테니스계를 놀라게 했을 뿐이었다. 그는 1937년 호주대회 우승을 제외하고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1922년에는 처음으로 여자부 대회가 개최되었다. 남자부 경기가 시작된지 19년만의 일이다. 하지만 여자 대회는 1960년대까지 남자 경기의 부수적인 대회로만 인식되었다.
② 윔블던 대회(www.wimbledon.org)
런던의 헨리 존스(H. Johnes)가 윔블던의 크로켓 클럽에서 소개한 후 1877년 이 클럽이 올잉글랜드 론 테니스 크리켓 클럽으로 개칭하고, 이 클럽 경기장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처음으로 코트의 크기, 폴트의 규정, 볼의 크기와 무게 등을 정하였다. 이 대회 후 영국의 테니스계는 급격히 발전하고 유럽 전역에 소개됨으로써 테니스의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의 정식 명칭은 전영국 선수권 대회라고 하였으며 처음 대회는 국내 대회였지만 점차 외국 선수의 참가를 허용하였다. 이 대회는 1968년부터 프로 선수의 참가도 인정되는 오픈 경기로써 매년 6월 4째주부터 7월 초순까지 개최되며 대회 명칭은 전영국 선수권대회이며 세계 4대 그랜드 슬램 경기의 하나이다.
③ 프랑스오픈(www.frenchopen.org)

프랑스오픈은 1925년 시작되었다.
대회 초대 챔피언은 프랑스의 전설 르네 라코스테. 라코스테는 이후 4년간 대회 결승전에 진출해 1927년과 1929년에 두 번 더 정상에 올랐으며 라코스테라는 의류 브랜드의 성공으로 사업가로 더 큰 명성을 쌓았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는 2차 대전의 영향으로 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
대회는 1928년 5월 롤랑가로에 코트가 건축되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파리시는 1927년 9월 프랑스 선수들이 미국으로부터 데이비스컵을 빼앗아 오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선수권 대회를 개최할만한 변변한 코트가 없자 파리시는 현재 롤랑가로 코트의 부지를 99년간 임차한 후 약 1년 동안 코트를 건축하게 되었다. 이것이 프랑스오픈이 열리는 롤랑가로 코트의 시초이다.
파리시는 이를 기념해 영국과 프랑스간의 국가 대항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롤랑가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수 많은 테니스팬들의 봄 철 사교장이 되었고 방문객의 수는 해마다 늘어갔다.
롤랑가로는 1980년 새로운 센터 코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존 센터 코트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 콘크리트로 센터 코트를 신축했다. 타원형의 센터 코트는 4천5백석의 수용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코트는 곧 1번 코트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코트를 더 지을 수 있는 기금을 확보한 롤랑가로는 1984년 확장 공사를 실시해 예전 럭비 구장이 있던 서쪽 지역에 9개의 코트를 추가로 건립했다.
1983년과 1993년 사이 프랑스의 테니스 영웅 장 보로트라(1989년), 르네 라코스테(1989년), 앙리 코쉐(1990년), 자크 부르뇽 (1991년)의 동상이 롤랑가로 코트 안에 설립되었다. 1994년 A코트가 건립되면서 롤랑가로 코트의 외형에 변화가 온다. 1997년 프랑스 테니스의 여걸 수잔 랑랑 코트로 불리게 된 이 코트는 수용 인원 1만68명의 대형 쇼 코트였다. 21세기를 맞으면서 롤랑가로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하였다. 1999년 대회가 끝나자마자 신축 공사를 시작해 롤랑가로에는 폭증하는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센터 코트가 신축되었다. 신축 센터코트에는 관중들을 위한 다양한 편의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④ US오픈(www.usopen.org)

매년 수 백만명의 팬들이 USTA 국립 테니스 센터에서 즐기는 US오픈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2주간 대회가 열리는 행사는 아니었다. 이 대회는 US국립 챔피언십으로 알려진 아마추어 대회에서 US오픈으로 바뀐 이후 아마추어와 프로 선수들에게 모두 개방되었다.
이 대회는 현재 남녀 단복식, 혼합 복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1881년 8월에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 카지노에서 남자만을 위한 US국립 단식 챔피언십으로 출발했다. 당시에는 미국 국립론테니스협회의 회원 클럽들에게만 출전 자격을 한정시켰다.
대회는 그 후 34년간 뉴포트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1900년에는 US국립 남자 복식 챔피언십이 열렸다. US남자 대회로 치러진지 6년만인 1887년 처음으로 US 여자 국립 단식 챔피언십이 필라델피아 크리켓 클럽에서 진행되었다. 1889년에는 여자 복식 경기가 함께 진행되었다. 여자 단식 경기는 필라델피아 크리켓 클럽, 웨스트 사이드 테니스 클럽, 미국 국립 테니스 센터 세 곳에서 개최되었다.
혼합 복식은 1892년 처음으로 공식 도입되었으며 1921년까지 여자 단복식과 함께 진행되었다. 1921년부터 혼합 복식은 US 국립 챔피언십의 남자 복식 프로그램과 통합되어 실시되었다.
대회는 1968년 일대 전기를 맞는다. 그 간 분산 개최되던 대회는 이 해를 맞아 5개 부서가 뉴욕, 퀸즈, 포레스트 힐즈의 웨스트 사이드 테니스 클럽 한 곳으로 통합 개최되었다.
총 상금 10만달러가 그 해 남녀 단식 경기에 출전한 남자 96명, 여자 63명의 선수들에게 주어졌다.
1968년에 혼합 복식은 열리지 않았다.
10만달러의 총상금으로 시작한 US오픈은 이제 500여명의 선수들에게 1천5백만달러의 상금을 지급하는 대형 대회로 변화되었다.
2) ATP투어대회
ATP투어대회는 ATP 투어(세계남자프로테니스대회)가 관할하고 있는 남자프로테니스대회의 공식적인 국제서키트로서 각 대회에서 지급하는 상금 규모와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① 마스터스 시리즈(Masters Series, www.masters-series.com)
실상금 2백45만달러 이상이 지급되는 대회로 ATP 투어 대회 중 최고 상금 규모인 9개 대회를 말한다. ATP측은 2천년부터 예전 수퍼 9 시리즈를 마스터스 시리즈로 이름을 바꾸고 연말 ATP 챔피언십도 마스터스 챔피언십으로 개명했다. 마스터스 시리즈 가운데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개최되는 에릭슨오픈의 상금은 2백70만달러이며, 유일하게 단식 본선이 96드로이며 10일간 개최된다. 에릭슨오픈은 1999년까지 립튼챔피언십있으며 대회 규모로 인해 제 5의 그랜드 슬램 대회로 불리었다.
② 인터내셔널 시리즈 골드(International Series Gold)
실상금 80만달러 이상이 지급되는 대회로 모두 11개 대회가 있다.
③ 인터내셔널 시리즈(International Series)
실상금 35만달러 이상이 지급되는 대회로 모두 45개 대회가 있다. 각 대회 주최측은 ATP투어가 정한 소정의 대회 개최비를 상금과는 별도로 ATP투어로 납부하도록 되어 있다. 대회 참가 신청 및 기권은 각 대회 본선 개최 월요일 42일 전까지 ATP투어로 해야 한다. ATP투어 대회에는 위와 같은 정규 서키트 외에 다음과 같은 공식 특수 대회가 있다.
④ 테니스 마스터스 컵(Tennis Masters Cup)
대회가 개최되는 주 월요일에 발표되는 ATP 챔피언즈레이스 랭킹 상위 8명의 선수를 초청하여 벌이는 ATP투어의 공식 단식 선수권 대회이다. 8명의 선수는 4명씩 2개조로 편성되어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예선을 실시하고, 라운드 로빈 예선의 각조 2위까지 총 4명의 선수가 본선 토너먼트를 가져 챔피언을 결정한다. 5세트 매치로 치러지는 결승전을 제외한 전 경기가 3세트 매치로 진행되며 총 3백70만 달러의 상금이 지급된다.
⑤ ATP투어 월드 더블즈 챔피언십(World Doubles Championship)
정규 ATP 투어 마지막 대회의 성적을 포함한 복식조별 팀레이스 랭킹 순위에 따라 상위 8개 복식조를 선발하여 개최되는 ATP투어의 공식 복식 선수권 대회이다. 8개 복식조는 4개조로 나뉘어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예선을 갖고 예선의 각조 2위까지 총 4개 복식조가 본선 토너먼트를 실시하여 챔피언을 가린다. 라운드 로빈으로 치러지는 예선은 3세트 매치로 진행되나 본선 토너먼트의 준결승과 결승은 5세트 매치로 열린다.
⑥ 월드팀 챔피언십(World Team Championship)
각국별로 3-4명의 선수로 구성된 8개팀이 참가하는 ATP투어의 공식 국가대항전이다. 8개국이 2개조로 편성되어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예선을 실시하고, 각조 1위팀이 결승에 올라 우승국을 결정한다. 총상금은 1백90만달러이다.
3) 남자 챌린저 대회
남자 챌린저 대회는 ATP투어대회보다 한 단계 등급이 낮은 대회로 상금 규모에 따라 2만5천달러, 3만7천5백달러, 5만달러, 7만5천달러, 10만달러, 12만5천달러 등 6단계로 구분되며 특별히 마련된 규정을 제외하고는 ATP 투어 대회 규정에 준해서 개최토록 되어 있다. 대회 참가 신청과 기권은 각 대회 본선이 시작되는 월요일 21일 전까지 하도록 되어 있다. 단식 본선 및 예선의 드로 규모는 32드로이며, 복식 본선은 16드로이다. ATP 단식 랭킹 1-10위까지의 선수는 남자챌린저대회에 참가할 수 없으며, 11-50위 사이의 선수들도 남자챌린저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ATP투어의 특별 승인을 받아야 한다.
4) 남자 퓨처스 대회
남자 퓨처스 대회는 상금 1만덜러인 대회가 3회 이상 또는 상금 1만5천달러인 대회가 2회 이상 연속적으로 개최되어야 하며 ITF 남자서키트대회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최국 테니스협회에서 개최토록 되어 있다. 남자 퓨처스 대회는 ITF의 남자퓨처스 및 서키트 대회 규정, 그리고 그랜드슬램 대회 규정에 따라 개최된다. 대회 참가신청은 각 대회가 시작되는 월요일의 14일 전까지 ITF로 해야 하며, 기권을 원할 경우에도 이날까지 서면으로 제출해야 한다.
5) 남자 서키트 대회
남자 서키트 대회는 주최국 테니스 협회에서 개최토록 되어 있으며 반드시 4개 단위 대회로 구성되어야 한다. 마지막 4번째 대회는 서키트 마스터스 대회이어야 한다. 각 단위 대회는 최소한 6천5백50달러 이상의 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남자 서키트 대회는 ITF의 남자 퓨처스 및 서키트 대회 규정, 그리고 그랜드 슬램 대회 규정에 따라 개최된다. 대회 참가 신청 및 기권에 대한 사항은 남자 퓨처스 대회와 같다. 각 서키트 대회는 단식 본선을 32 또는 64드로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32드로로 단식 본선을 실시할 경우에는 4차 마스터스대회 출전 인원을 24명으로, 64드로로 단식 본선을 진행할 경우에는 48명으로 각각 축소하여 진행토록 되어 있다. 복식의 경우에도 16 또는 32드로 중에서 선택하여 진행할 수 있으며, 마스터스대회에서는 이를 8 또는 16드로로 축소하여 진행해야 한다. 1-3차까지의 단위 대회에서는 예선이 개최되지만 4차마스터스대회는 1-3차 대회까지의 서키트 점수 합산 순위에 따라 출전 자격이 부여된다.
여자대회
1) 그랜드 슬램 대회
4대 그랜드 슬램 대회는 호주오픈(호주 멜버른), 프랑스오픈(프랑스 파리), 윔블던(영국 윔블던), US오픈(미국 뉴욕)을 말한다. 테니스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4대 그랜드 슬램 대회는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ITF그랜드슬램대회 위원회에 의해 공표된 그랜드슬램대회 규정에 따라 개최된다.
그랜드 슬램 대회는 다른 대회와는 달리 남녀 단식과 복식 외에 혼합복식 경기가 추가되며 상금액이 미리 지정되지 않는다. 상금은 전년도 대비 매년 인상되며 대회 개최 전 각 대회조직위원회가 그 해의 상금액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참가 신청과 벌칙이 부과되지 않는 기권은 각 대회 본선이 개최되는 월요일을 기준으로 42일 전까지 해야 한다.
각 대회는 그랜드 슬램 대회 위원회가 특별히 승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식 예선 및 본선은 128드로, 그리고 복식 본선은 64드로로 진행하며 복식 예선 실시 여부를 결정하는 선택권을 가진다.
WTA투어 대회는 위와 같은 정규 서키트 외에 공식 대회인 WTA투어 챔피언십을 개최하고 있다. WTA투어 챔피언십은 정규 WTA투어대회가 모두 종료되는 매년 11월 중순에 개최되는 연말 결산대회의 성격을 가진 대회이다. 올해는 10월 말에 열린다. WTA투어 챔피언십은 WTA투어 고유의 보너스 풀 제도에 따라 한 시즌 중 가장 많은 보너스 점수를 획득한 단식 상위 16명의 선수와 복식 상위 8개팀이 출전해 단, 복식 챔피언을 가리게 된다. 5세트 매치로 진행되는 단식 결승을 제외하고는 전 경기가 3세트 매치로 진행된다. WTA투어 챔피언십의 총상금은 3백만달러이다.
2) ATP투어대회
ATP투어대회는 ATP 투어(세계남자프로테니스대회)가 관할하고 있는 남자프로테니스대회의 공식적인 국제서키트로서 각 대회에서 지급하는 상금 규모와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① 1급대회(Tier Ⅰ)
최소 1백8만달러 이상의 상금이 지급되는 대회로 다음과 같은 9개 대회가 있다. 특히 1급 대회 중 에릭슨 오픈은 11일간 본선을 개최하며 단식 본선이 96드로로 진행된다. 에릭슨오픈 외의 1급 대회로는 토레이팬퍼시픽오픈(일본 도쿄), 뉴스위크챔피언십(미국 인디안웰즈), 패밀리서클컵(미국 힐튼헤드아일랜드), 독일오픈(독일 베를린), 이탈리아오픈(이탈리아 로마), 뒤모리에오픈(캐나다 몬트리올), 스위스컴챌린저(스위스 취리히), 레이디스크레믈린컵(러시아 모스크바)이다.
② 2급대회(Tier Ⅱ)
최소 53만5천달러 이상의 상금이 지급되는 대회로 모두 15개 대회가 있다.
③ 3급대회(Tier Ⅲ)
최소 17만 달러 이상의 상금이 지급되는 대회로 모두 15개 대회가 있다.
④ 4급대회(Tier Ⅳ)
최소 11만 달러 이상의 상금이 지급되는 대회로 모두 17개 대회가 있다. 상기 상금에는 대회 등급에 따라 WTA 투어에 지불해야 하는 소정의 대회 개최비가 포함되어 있다.
3) ITF 여자서키트 대회
ITF 여자서키트대회는 앞서 언급한 그랜드 슬램 대회와 WTA투어대회 외에 국제테니스연맹이 개최를 승인한 상금 규모 1만-7만5천달러인 여자프로대회의 총칭이다. ITF 여자서키트대회는 각 대회에서 지급하는 상금 규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① 상금 2만달러 여자서키트대회
각기 5천달러의 상금이 지급되는 3개 대회와 그 대회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들을 위해 최소한 5천달러의 상금이 지급되는 마스터스대회로 구성되는 서키트 대회이다. 즉 총상금 규모는 최소 2만달러이어야 한다.
② 상금 4만달러 여자서키트대회
각기 1만달러의 상금이 지급되는 3개 대회와 그 대회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들을 위해 최소 1만달러의 상금이 지급되는 마스터스대회로 구성되는 서키트대회이다. 즉 총상금 규모는 최소 4만달러이어야 한다. 첫 3개 대회 본선에 출전한 경우에 한해 선수는 성적에 따른 대회 점수 및 승리를 거둔 상대 선수의 랭킹에 따라 주어지는 보너스 점수를 부여받으며 마스터스대회에서는 2배수의 대회 점수와 보너스 점수가 주어지고 각 대회별로 출전 횟수를 산정한다.
③ 상금 1만달러 여자 서키트대회
상금 1만달러가 지급되는 개별 대회이다. 선수는 본선에 출전한 경우에 한해 성적에 따른 대회 점수 및 승리를 거둔 상대 선수의 랭킹에 따라 주어지는 보너스 점수를 부여받으며 1개 대회 출전으로 간주한다.
④ 상금 2만5천달러, 5만달러, 7만5천달러 여자 서키트 대회
상금 2만5천달러, 5만달러 또는 7만5천달러가 지급되는 개별 대회이다. 선수는 본선 및 예선 최종 3라운드까지 출전한 경우에 한해 성적에 따른 대회 점수 및 상대 선수의 랭킹에 따라 주어지는 보너스 점수를 부여받으며 1개 대회 출전으로 계산한다.
⑤ 상금 5만달러+H, 7만5천달러+H 여자 서키트 대회
숙박을 제공하는 상금 5만달러 또는 7만5천달러가 지급되는 개별 대회이다. 선수는 본선 및 에선 최종 3라운드까지 출전한 경우에 한해 성적에 따른 대회 점수 및 상대 선수의 랭킹에 따라 주어지는 보너스 점수를 부여받으며 1개 대회 출전으로 계산한다.
서양의 테니스사
테니스 경기의 원류를 추적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구구한 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이와 비슷한 경기를 했으며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즐겼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11세기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왕후 귀족과 사원의 승려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던 볼 게임의 일종으로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라 뽐므(La Paum)란 게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며 이 경기의 발생시부터 오늘날까지 일관된 경기 방식은 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볼을 치는 경기라는 것이다.

또한 12세기초부터 16세기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했던 이 경기는 12세기 프랑스 수도원에서 고안되었다고 하며 쥬 드 폼므(Jew de Paume)(구희(球戱)관)이라고 불렀다. 폼므란 프랑스어로 손바닥을 말하며 이것이 13세기 경 프랑스 귀족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쥬 드 폼므라는 손바닥 게임으로 발전했다. 쥬 드 폼므는 털이나 천을 채워 둥글게 만든 공을 맨손이나 장갑을 끼고 손바닥으로 때리던 경기로써, 코트의 중앙에 만든 경계 벽을 넘어서 반대쪽 3방향의 벽 어디에든지 손바닥으로 공을 쳐 넣으면 상대방은 이 공을 직접 또는 한 번 바운드 된 공을 손바닥으로 다시 쳐서 넘기는 경기였다.
이러한 쥬 드 폼므 경기가 테니스라고 불리게 된 것은 볼을 치라고 하는 테네(tennez)라고 하는 발음에서 1360년경 영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테니스라고 하는 명칭으로 조어하여 소개할 때부터라고 한다.
이 경기는 왕후귀족과 승려들이 가장 애호한 스포츠 중 하나이며 중세 유럽에서는 중요한 경기 중 하나였다. 쥬 드 폼므는 수도원의 정원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코트의 구조와 복잡한 룰, 그리고 볼을 만드는 사람을 왕후귀족이 고용한 것 등을 볼 때 이 게임은 왕후귀족의 전유물로 삼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14세기 경에는 신흥 세력인 도시 귀족들도 쥬 드 폼므 경기에 열중하기 시작하여 각 도시에도 많은 구희(球戱)관이 세워짐으로써 점차 대중화되어 갔으며 대학생들도 애호하게 되어 중세 유럽의 대학 도시에는 필수적으로 이 구희관이 세워졌다고 한다.
쥬 드 폼므는 손바닥으로 볼을 되받아치는 경기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너무 손이 아파 장갑을 끼고 경기를 하던 중 손 대신에 다른 타구 도구를 찾게 되었으며 15세기 후반에 라켓을 고안하여 16세기 경에는 라켓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경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스포츠로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1596년 파리의 인구 30만명에 코트는 250개가 있었다고 한다.
쥬 드 폼므는 게임 자체를 즐기는 것도 있었지만 도박을 즐기는 것에도 큰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일 파운드의 내기 돈을 지불하거나 도박 등으로도 이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경기는 17세기경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급속하게 쇠퇴하여 일부 애호가들에 의해 겨우 전승되어 왔으며 폐쇄된 구희관은 점차 극장으로 개장되어 계몽주의 시대의 연극 붐에 공헌하게 되었다.
또한 12세기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수도원 정원에서 탄생하였다고 하는 쥬 드 폼므 경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다. 즉, 이 게임이 수도원에서 고안되었다고 하여도 그 이후의 역사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손바닥으로 볼을 치는 게임은 북프랑스 만이 아닌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바스크 지방(피레네 산맥 남북 프랑스, 스페인에 걸친 지역)에서도 옛날부터 행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관계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쥬 드 폼므 경기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생성, 발전을 이뤄 곧 「론 테니스」로 전환하고 있었다고 하는 속설이 통용되고 있지만 정설은 아니다. 여하튼 테니스의 정식 명칭은 론테니스라고 하며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경기로는 크리켓이 있었으나 넓은 저택의 잔디밭에서 할 수 있는 활동적인 스포츠를 원했다. 이 소망은 1873년 인도 주재군의 소령이었던 영국 사람 윙필드(W. Wingfield) 소령에 의하여 급성장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대영제국의 중산층들은 늘어나는 여가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74년 윙필드는 일정한 코트와 네트를 만들었으며 1875년에는 메릴리본 크리켓 클럽(Marylebone Cricket Club)에서 규칙을 통일함으로써 근대 스포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어 1877년에는 제 1회 영국 선수권 대회가 윔블던에서 열려 지금까지도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이어져오고 있다. 1896년 제 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서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나, 프로 선수의 참가가 문제가 되어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부터 경기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서 64년 만에 다시 정식 경기 종목으로 부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론 테니스
철과 고무의 제조, 가공 기술의 혜택을 직접 받은 전형적인 스포츠로써 론테니스는 1973년에 영국의 윙필드가 「스피이리스틱」(또는 론테니스)이라고 하는 작은 책자를 출판함으로써 코트의 모양, 크기, 네트의 높이나 치는 방법, 볼, 라켓, 게임 방법 등을 해설하고 규칙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윙필드가 론테니스의 창안자라고 불리우고 있다.

철과 고무의 제조, 가공 기술의 혜택을 직접 받은 전형적인 스포츠로써 론테니스는 1973년에 영국의 윙필드가 「스피이리스틱」(또는 론테니스)이라고 하는 작은 책자를 출판함으로써 코트의 모양, 크기, 네트의 높이나 치는 방법, 볼, 라켓, 게임 방법 등을 해설하고 규칙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윙필드가 론테니스의 창안자라고 불리우고 있다.
윙필드는 책 출판 1년 후인 1874년 이 규칙집과 용구 일체를 정리하여 자신이 창안한 론테니스라고 하는 판매물을 실용신안특허를 신청하였다.
이때의 판매 포인트는 경기하기에 적합한 들판에 네트를 치고 라인을 그리면 어디에서라도 경기를 할 수 있는 이동식 테니스 코트라고 하는 것이었다. 네트는 텐트용 목재폴을 세우고 두 개의 로프로 끌어당겨 팩으로 고정하였으며 가볍고 들어 옮기기 쉬운 것으로써 들판 어디에서나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론테니스의 규칙을 검토하는 위원회가 공식 조직되었지만 정하진 못하고 1877년에 제1회 윔블던 대회의 규칙을 공식적인 규칙으로 하였다. 이 때의 네트 포스트는 간단한 목재였다. 그러므로 네트의 장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중앙 부분이 내려간 상태에서 경기를 행하였다. 네트의 높이가 정식으로 고정된 것은 철제 네트 포스트가 개발된 1883년이었다. 철제의 네트 포스트, 와이어, 와인더의 세가지 장비를 갖추고서야 네트의 장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기술은 자전거 제조 기술을 응용하였으며 동시에 대량 생산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볼은 1874년에 히스코트가 터지기 쉬운 고무공에 플란넬 천을 덮어 보강한 후 튼튼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공을 만드는 기술 또한 자전거의 타이어 튜브를 만드는 기술을 응용하였다. 이후 테니스볼은 개선을 거듭하여 잔디 위에서도 바운드 되는 공을 만들어 냄으로써, 론테니스는 더욱 더 재미있는 게임이 되었다. 이후, 론테니스는 순식간에 대중화 되었으며 고도의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론테니스가 급속하게 보급되었던 배경의 또 다른 이유는 제1회 윔블던 대회였다. 그리고 이 대회를 조직한 것은 전 영국 크로켓 클럽의 명예회장이며 당시의 대표적인 스포츠 잡지의 하나인 「필드」지의 편집장 월슈였다. 당시 이 클럽은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 클럽 소유인 롤러의 고장을 수선할 돈이 없어 명예회장 월슈가 하나의 계획을 제안하였다.
월슈는 「필드」지의 사장을 설득하여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은제컵을 기증받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 후 월슈는 「필드」지의 지면을 완전히 활용하여 대회 요강이나 룰, 일정이나 입장료 등을 선전하는데 전력을 기울인 결과 이 새로운 론테니스 경기는 악천후가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예상 외의 관객을 모아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현재의 테니스는 정식으로는 론테니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국에서 발달한 경기다. 현대 테니스의 시조였던 쥬 드 폼므 등의 경기는 모두 실내 코트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실내 코트 건설과 유지에는 많은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이 경기는 부유층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경기였다. 그러므로 19세기 경부터 실외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경기가 개발되었다. 1874년 윙필드가 실외 경기로써 개발한 방법이 현대 테니스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네트의 중심에 가늘게 된 마치 모래 시계와 같은 코트에서 경기를 했으며 코트의 넓이와 네트의 높이는 자유로웠던 것이 1875년 마레본의 크리켓 클럽의 임원들이 높이(1.2미터)와 네트 포스트(1.54미터)를 정하였다.
테니스 경기의 보급
1880년대에 들어오면서 크리켓 대신 론테니스가 홈파티의 주역으로서 등장하게 되었으며 테니스의 인기가 상승한 것은 그 때까지의 게임에서 없었던 혼합복식이 행해지고 부터이다.

이 게임은 중산층들이 자택의 정원을 개방하여 많은 가족을 초빙한 후 여러 팀의 혼합 복식 조를 조직하고 정원에서 텐트를 치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의자를 설치한 후 테이블에서 음식과 대화를 즐기면서 테니스 경기를 관전하든지 스스로 플레이를 하면서 즐겼다.
여성 해방 운동과 스포츠 패션의 유행

테니스 경기를 행하는 경우 여성들은 작은 모자를 썼으며 스커트는 롱스커트를 착용하였기 때문에 스트로크를 할 경우 동작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경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의 참가에는 먼저 이러한 복장 해결이 선결 과제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남성들의 흉내 밖에 안되었던 여성들이 스포츠 종목마다 기능적인 옷이 개발됨으로써 본격적인 참가가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이 테니스였으며 스케이트, 골프, 등산, 수영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코트 테니스
옥내 경기로서 쥬 드 폼므 경기가 영국에 소개된 것은 1360년 경이며, 당시 에드워드 3세도 사원에서 이 경기를 하고 장려했기 때문에 1600년경에는 영국 내에서 매우 유행했다. 코트 테니스는 110피트(33.52미터)×38피트(11.58미터)의 장방형의 둘레에 높이 30피트(9.14미터)로써 벽과 바닥은 시멘트를 발랐으며 중앙은 네트로써 양분하였다. 그리고 한쪽은 서비스 사이드, 다른 한쪽은 승패 결정의 사이드로 했다.
또 라켓으로 볼을 치게 되어 라켓은 무겁고 굵은 거트(gut)를 팽행하게 쳐서 스핀이 걸리기 쉽게 다소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만들어 경기를 하였다.
한국의 테니스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테니스 경기가 시작된 것은 1900년대부터였다. 1908년 4월 18일자 탁지부(현재 재경부) 관리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회동구락부를 조직한 뒤 미창동에서 테니스 코트를 마련해 경기를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테니스의 시초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서 파생한 연식 정구였으며 테니스(Lawn tennis, 경식정구)는 그보다 훨씬 뒤의 일로써, 정식 경기가 열린 것은 20여년이나 지난 후였다. 1927년 9월 24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용산의 철도국 코트에서 일본 오사카 매일신문사 경성지국 주최로 제1회 테니스 선수권대회가 열렸으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테니스 경기이다.
이 경기에서 상업은행 소속의 김필응 선수가 단식 경기에 출전했는데 경기 도중 기권하여 일본인이 우승했으며, 복식 경기에서도 일본이 우승했다. 이 때만 해도 테니스공은 연식보다 구하기 어려웠으며 또한 연식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때인지라 테니스 경기를 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제1회 선수권대회 후, 경성 사범학교와 용산 철도국을 중심으로 테니스 경기를 많이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3일부터 7일간 미국 보스턴시에서 열린 전미주대학 테니스 선수권 대회에 대구 출신으로 보스턴 대학에 재학 중이던 김태구 선수가 참가하여 선수권을 획득했다. 김태구 선수의 우승은 한국 테니스계에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1928년 10월 13일부터 5일간 경성운동장에 열린 제4회 조선 신궁경기대회에서 테니스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같은 해 4월 10일에는 경성제국대학 주최의 제1회 중등학교 테니스 대회가 경성 운동장에서 열렸다.
1930년 9월에 세브란스병원의 오한영, 체신국의 강성태 등이 서울경구 구락부를 조직, 국내 최초의 테니스 클럽으로 발족하여 재경 서양인들과 경기를 자주 하였다.
1938년 8월 27일부터 28일까지 양일간 만주 신경에서 열린 제1회 조선·만주대항 테니스대회에서 우리나라의 길인형, 백윤복, 박용선, 황기성, 권인복, 김태식, 이봉기, 김영준, 장일강, 정사련 등의 선수가 출전한 최초의 원정 경기에서 7대6으로 우승하였다. 그러나 발전도상에 있던 테니스는 1942년부터 일제의 운동금지 조치로 중지하게 되었으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테니스 코트도 태평양 전쟁에 광분하던 일제의 식량 증산을 위한다는 구실 아래 파헤쳐졌으며 감자나 호박, 채소, 피마자 따위를 심게 되고 말았다. 해방과 더불어 1945년 10월 1일 조선테니스협회가 발족하였으며 이듬해 1946년 7월 25일 제1회 전국테니스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잃었던 경기를 다시 열게 되었다.
이후 연식에서 테니스로 전향하는 선수들이 많이 늘어나 테니스계는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1948년 6월 1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대한테니스연맹이 주최한 제1회 전국 일반학생 테니스대회가 열렸으며, 1949년 4월 17일에는 테니스연맹이 일반인과 대학생의 경기를 개최한 바 단복식 모두 학생팀이 승리를 하였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던 6·25 동란으로 테니스 경기도 한 때 중단되었다가 정부 회복 후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53년 9월 테니스협회는 대한체육회에 정식으로 가입했으며 대한테니스협회(The Korean Lawn Tennis Assocition)로 명칭을 바꾼 협회는 1954년 5월 16일 서울운동장 코트에서 한미 친선 테니스대회를 개최하였다. 비록 한국팀이 우승하였으나 미국인들의 강력한 서비스와 과감한 스매시, 경쾌하고 결정적인 발리 등에서 한국 테니스계는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해 10월 5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니스 선수인 크래머(미국), 세그러(에콰도르), 곤잘레스(멕시코), 세찌맨(호주), 미8군 테니스 코치 골든 등 선수들의 시범 경기가 있었다.
이 경기를 통하여 테니스계는 물론 일본 관중들까지도 그들의 묘기에 경탄했으며, 테니스의 과학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연습 방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외국 선수들의 시범 경기는 한국 테니스 경기 발전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1956년 9월에는 자유중국의 극난테니스팀이 내한하여 친선 경기를 한 결과 남자는 3대0으로 한국이 승리하고, 여자는 3대0으로 자유중국팀이 승리했다. 1957년 9월에는 우리 국군테니스팀이 자유중국에 원정하여 7전3승4패의 기록을 남겼으며, 1958년 제3회 아시아 경기 대회에 이상훈 등 4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좋은 기록은 아니었으나 많은 기술을 배웠다.
1959년 1월에는 한국 대표팀이 자유 중국에 원정하여 4전승하였으며, 홍콩에서는 3전 2승 1패를 기록하였다. 그 후 1960년부터는 국제 경기의 진출도 활발해졌으며 1960년도부터 데이비스컵 테니스 동부지역 예선대회에 해마다 출전(1961년만 기권)하여 임충량, 김두환, 정영호 등의 선수들이 선전했으며 1969년과 1970년의 세계 청소년테니스챌린지볼 챔피언 경기와 선샤인컵, 조지·스매더스대회에 출전하였으며, 조시·스매더스대회에서는 코스타리카를 2대0으로 물리쳤으나 결승전에서 이스라엘에게 1대2로 패하여, 한국은 2위를 차지한 바 있다.
또한 전일본 테니스 선수권 대회에도 1964년도부터 출전, 1969년에는 한국 테니스 외국 원정 이래 처음으로 혼합복식 조에서 김두환, 양정순 선수가 입상하였으며 양정순 선수는 여자 단식에서도 입상하였다 특히 1970년 이후부터 테니스붐을 타고 우리나라에도 급속히 보급·발전되어 1982년 2월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었던 제9회 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은 4개 종목에서 우승, 테니스 한국의 앞날을 밝게 해주었다.
▼ 다음은 2000년 9월 8일자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에 '테니스 코리아'란 제목으로 실린 칼럼이다. 한국 테니스사를 잘 요약해 둔 것이라 게재한다. 한국 테니스사의 시작이 다르나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 정확한 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이규태 코너] 테니스 코리아
이형택 군의 US오픈 국제대회 16강 진출은 테니스가 들어온 지 백 십수년 만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테니스를 들여온 것은 미국 초대공사인 푸트로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 공사관 직원과 개화파 인사들 간에 친선경기가 있었다.
국내외 인사들의 사교장이던 정동구락부에는 테니스 코트가 마련돼 있어 외국인 남녀의 시합이 있어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됐었다.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인 에비슨 박사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더운 여름날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 양반을 정동 구락부에 초대하여 테니스 시합을 구경시켰다. 경기를 마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나오는 한 미국인 선수가 이 경기가 재미있더냐고 이 양반에게 물었다. 아무런 소득없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며 이처럼 힘들어 할 일이라면 왜 하인을 시키지 않는가 하고 오히려 반문을 했다.」
개화의 선구자 김옥균이 갑신정변 이전에 화동의 자기 집에 테니스 코트를 만들고 푸트 공사 부부와 애스톤 영국공사 내외를 초청해 시합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기록상 한국 테니스의 효시는 김옥균이랄 수 있다. 최초로 테니스를 한 여인은 1893년 왕립병원인 제중원의 간호사 지망생으로 전기 에비슨 박사를 찾아온 김 씨라는 과부일 것이다.
「이름을 물어도, 나이를 물어도, 남편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도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치마주름만 비틀며 대답하지 않고 그저 간호사가 되고 싶으냐고만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던ㅡ」 이 김 씨에게 긴장을 풀어주고자 에비슨 박사는 테니스를 가르쳤다.
「영국에 술 취한 사람 수보다 프랑스에 폼을 하는 사람 수가 많다」할 정도로 중세 프랑스에서 라켓으로 공을 네트로 넘기며 겨루는 폼이 유행했었다. 앙리 4세는 빵집 주인과 폼을 겨뤄 패하자 빵값을 내린다고 공갈하여 재시합을 했을 만큼 상하 없이 폼을 즐겼다.
이 폼이 영국에 건너가 테니스로 발전했는데 귀족 스포츠로 온통 흰 모자,흰 셔츠,팬츠,스커트,흰 양말, 흰 운동화 아니고는 출장 못하게 하고 하층 계급이나 유색인종은 출장하지 못하게 했다. 이 같은 백인주의 전통 때문에 멀어져 있던 테니스에 한국인이 등정에 가능성을 발휘한 것은 오히려 해외에서보다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르네 라코스테
휴이트가 약관의 나이에 세계랭킹 1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그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아직 은퇴를 발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90년대를 호령해왔던 샘프라스, 애거시의 시대가 서서히 가고 20세 초반 신세대 선수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130년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테니스 선수가 누구였던가를 돌이켜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들을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제 1편은 1920년대를 풍미했던 프랑스의 전설적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를 소개하기로 한다.
르네 라코스테(Rene Lacoste). 그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일반사람들은 그것이 악어상표의 의류업체라는 것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라코스테(불어발음은 '라꼬스뜨'에 더 가깝다)가 골프의 아놀드 파머처럼 한때 유명한 스포츠 선수로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굴지의 의류업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라코스테가 왜 '악어'와 관련이 있는지는 테니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테니스 초창기 때인 1904년 7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나이 15세에 이르기까지 그는 테니스를 칠 줄 모르는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다. 자동차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부유하게 자랄 수 있었고 테니스를 직업으로 삼아 성공해야겠다는 욕구 또한 없었다.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자동차공장을 물려받아 성공적으로 경영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빠져드는 테니스의 묘미 때문에 테니스 선수로 진로를 바꿀 것을 결정하자 이젠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의 아버지는 테니스에 헌신적으로 임하는 아들에게 5년 내에 테니스 챔피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을 허락의 조건으로 내놓았다. 테니스에 입문한지 5년만에 세계챔피언이 된다는 것. 요즘 같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는 기어코 해내고 만다.
5년은 아니지만 테니스에 입문한지 꼭 6년만인 1925년, 그의나이 21세에 프랑스 오픈을 석권하게 된다. 그는 같은해 영국 테니스 선수권 대회(지금의 윔블던)에서도 발군의 기량으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이듬해인 1926년과 1927년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미 테니스 선수권 대회(지금의 US 오픈) 연속우승에 이르며 승승장구 하였다. 특히 1927년 US 오픈 결승은 상대자가 20-25년 US 오픈 6년 연속 우승자였던 윌리엄 틸든(William Tilden)이었고 스코어 또한 11-9 6-3 11-9 였기 때문에(당시는 타이브레이크가 적용되지 않았음) 라코스테로서는 가장 짜릿한 우승이었을 것이다. 1927년 프랑스오픈도 석권한 라코스테는 1928년 윔블던, 1929년 다시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프랑스오픈 3회 우승, 윔블던과 US 오픈 각각 2회씩 도합 7회의 메이저 타이틀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1924년 윔블던과 26, 28년 프랑스 오픈에서는 아깝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지만 당시 또 다른 프랑스의 스타 보로트라(Borotra)와 짝을 이뤄 1925년 윔블던 복식에서, 1924년, 1925년, 1929년에는 프랑스 오픈 복식에서 우승했다. 그가 메이저 대회중 호주오픈에만 우승하지 못했지만 당시의 비행기로 호주까지 날아가 경기에 참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감안한다면 그가 따낸 11개의 메이저 타이틀(복식 포함)이 어느 정도의 성과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복식을 포함하여 총 11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따냈지만 그를 빛내 준 또 하나의 사건은 바로 데이비스컵 우승이었다. 1927년 그는 역대 최강의 프랑스팀에 합류, 장 보로트라(Jean Borotra, 28년 호주오픈, 26년 윔블던, 31년 프랑스오픈 단식우승), 앙리 코셰(Henry Coche, 28년 US오픈, 27,29 윔블던, 26,28,20,32 프랑스오픈 단식우승), 자크 브뤼뇽(Jacques Brugnon)과 함께 프랑스에 처음으로 데이비스컵 우승컵을 안기는데 기여하였고 프랑스는 이후 6년간이나 이 우승컵을 보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라코스테와 그의 동료들은 1976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컴퓨터 집계에 의한 랭킹 시스템이 없었던 그 당시 수작업에 의한 랭킹시스템으로 그는 1924년부터 6년간 톱텐을 유지했으며 특히 1926-27년엔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꼼꼼한 성격의 라코스테는 시합 전에는 상대의 선수에 관한 모든 사항을 연구하는 선수로 유명했고, 시합중에는 상대선수가 지치기를 기다려 지구전에 의한 승리전략을 펼치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또한 현대적 개념의 서브와 발리, 패싱샷과 로빙 기술들은 모두 라코스테가 선구자로서 그가 30년대 프랑스 데이비스컵 사령탑을 맡았을 당시 후배 선수들에게 전수되어 크게 효과를 보기도 하였다.
라코스테는 테니스 뿐만 아니라 테니스 용품 발명가로도 유명하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볼 로빙머신(ball lobbing machine)을 개발하였으며 메탈 테니스 라켓을 처음으로 선보여 후에 지미 코너스가 그의 메탈프레임 테니스 라켓(윌슨 T2000과 유사한 라켓)으로 세계 테니스를 평정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악어무늬의 로고가 새겨진 폴로(polo) 티셔츠는 전세계의 인기 스포츠 웨어가 되기에 이른다. 그의 별명이 '악어'가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 였다. 미국 보스턴에서 열리는 경기에 출전하게 된 라코스테는 경기가 있기 전날 한 전시장에서 악어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보게 된다. 이것을 무척 갖고싶어 했던 라코스테가 코치에게 자기가 만일 경기에서 승리하면 이 악어가죽 가방을 사달라고 졸랐던 것이다. 하지만 라코스테는 경기에서 패했고 결국 그 악어가죽 가방은 그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동료들이 그를 놀릴 의도로 그를 '악어'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악어라는 자신의 별명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별명을 로고로 내세워 후에 의류사업을 시작,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류업체 중 하나인 "라코스테"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아내인 시몬느 디옹 숌므 그녀는 프랑스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오픈(골프)에서 우승했다-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딸 까뜨린느 라코스테가 어머니에 이어 1967년 US 오픈(골프)에 우승한 바 있다. 테니스 선수로도 성공을 거두어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사업가로도 수완을 발휘하여 오늘날의 세계적 의류업체 라코스테를 탄생시킨 그는 5년전인 1996년 10월 12일 프랑스의 생장드뤼(St. Jean de Luz)에 고요히 잠들었다.
<박일균 필자 후기>
"테니스의 전설들"은 라코스테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발표될 예정입니다. 계획중인 선수로는 돈 벋지(Don Budge), 로드 레이버(Rod Laver), 로이 에머슨(Roy Emerson), 비욘 보그(Bjorn Borg), 지미 코너스(Jimmy Conners), 존 메켄로(John McEnroe), 매츠 빌란더(Mats Wilander), 슈테판 에드버그(Stephan Edberg), 이반 랜들(Ivan Lendl), 보리스 베커(Boris Becker) 등이, 여자 선수로는 모린 코놀리(Maureen Conolly), 마거릿 스미스 코트(M. Smith Court), 빌리진 킹(Bille Jean King), 크리스 에버트(Chris Evert),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M. Navratilova), 슈테피 그라프(S. Graf) 등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모두 발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독자들의 반응이 좋을 경우, 집필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할 경우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돈 벗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니스 선수를 꼽으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70년대에 테니스를 관심있게 보았던 사람이라면 지미 코너스나 비욘 보그, 존 메켄로를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80년대에 테니스를 즐겼던 사람이라면 이반 랜들, 보리스 베커 등을, 90년대 이후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샘프라스나 애거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도 이루지 못한 혁혁한 업적을 세운 전설적 테니스인들이 눈에 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테니스 역사상 최초로 4대메이저 타이틀을 한해에 모조리 달성한 그랜드슬래머(필자후기 참조)이자 30년대 불세출의 스타였던 돈 벗지(Don Budge)일 것이다.
돈 벗지(본명: John Donald Budge, 1915-2000). 그는 1915년 6월 13일, 서구 유럽에선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 태생으로서 전직 축구선수였던 그의 아버지가 미국에 처음 정착한 곳이 바로 캘리포니아 시티였고 그는 어린 시절을 줄곳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본격적으로 테니스를 시작하고부터 파워넘치는 서브와 강력한 백핸드(그는 원핸드 백핸드를 공격형으로 전환한 최초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를 주무기로 고속 성장하였으며 네트 플레이에 대한 감각을 살리려고 수많은 연습에 몰입한 결과 주위로부터 진정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19세 되던 해 비로소 데이비스컵 미국대표팀으로 발탁되기에 이르렀고 20세인 1935년 US오픈 복식 준우승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메이저 타이틀 사냥에 나서게 된다.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바로 1936년 US 오픈 결승에서였다. 당시 상대선수는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랭킹 1위였던 영국의 프레드 페리(Fred Perry)였다. -페리는 34-36년 3년연속 윔블던 우승자였고 33,34,36년 US 오픈 챔피언, 34년 호주오픈, 35년 프랑스 오픈 등 서로 다른 해에 4대메이저 타이틀을 최초로 석권했던 선수였다.(필자후기 참조)- 결승은 4세트까지 2대2의 팽팽한 접전이었고 5세트만 따내면 자신의 첫 메이저 타이틀이 되는 기회였는데 아깝게도 5세트는 10-8로 내주게 되면서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첫 메이저 타이틀은 다음해인 1937년 윔블던에서 이루어진다. 상대자는 34, 36년 프랑스 오픈 우승자인 독일의 폰 크람(G. von Cramm)이었고 벗지는 5세트 접전끝에 크람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벗지의 우승행진은 계속된다. 당해에 US 오픈마저 석권하여 랭킹 1위에 오른 그는 대망의 38년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 호주오픈(당시 호주오픈은 12월경에 열렸음)을 연달아 제패하여 역사상 최초의 한해 그랜드슬램 달성에 성공하게 된다. 물론 이전의 프레드 페리의 경우도 4대 메이저 타이틀을 모두 석권했지만 한 해에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벗지의 [최초 그랜드슬램 한해 달성]은 후세에도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가 따낸 메이저 타이틀은 38년 4대 그랜드슬램을 포함, 37년 2개를 합쳐 단식 6개와 복식 8개(37-38 윔블던, 36,38 US오픈/37-38 윔블던, US오픈 혼합복식) 등 총 14개에 이른다. 특히 38년의 42승 2패라는 전적과 국가 대항인 데이비스컵에서 이룬 19승 2패는 당시 최고의 승률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벗지는 이후에도 그랜드슬램 석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곧이은 2차세계대전 발발로 활동범위에 제약을 받았다. 메이저 대회 개최국 중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5-6년간 개최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1차세계대전 중에 태어나 선수로서 왕성한 실력을 발휘할 시기에 또 2차대전이 발발, 그의 기록갱신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더 많은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임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자명한 것이었다. 그는 특히 전쟁이 한창인 1942년에 미공군에 입대, 부대훈련중 입은 어깨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으며 2차대전이 끝난 후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체력에 한계를 느낄 때였다. 1955년 그의 나이 40세에 미국 클레이코트 챔피언쉽에서 우승한 것을 끝으로 그의 테니스 인생은 막을 내린다.
벗지는 테니스 선수로는 드물게 현역시절에 집필활동을 시작, 테니스교본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가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1937년 발간된 "론테니스 게임의 방법(How Lawn Tennis Is Played)"과 39년 발간된 "테니스에 관하여(On Tennis)"는 테니스 교본의 고전에 속하는 훌륭한 지침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937년 38년 2년 연속으로 AP통신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기록되었고 미국 테니스 매거진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선수 20명'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64년엔 은퇴한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년전인 1999년 12월, 그는 운전 중 감각을 잃고 도로를 이탈,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갈비뼈가 부러져 팬실베니아주 스크랜턴 병원으로 이송된다. 노령에 심한 부상을 입게된 테니스의 영웅은 한달여 동안 산소호흡기로 연명하였으나 결국 2000년 1월 26일, 아내와 두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일균 필자 후기>
1.<테니스의 전설들>을 애독하는 분들에게 잠시 그랜드슬램(Grand Slam)이라는 개념에 관하여 좀 더 명확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그랜드슬램'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키어렌(John Kieran)이 1933년 당시 호주의 테니스 선수 잭 크로포드(Jack Crawford)가 4대 메이저 타이틀을 한해에 모두 달성하려고 하자 처음으로 붙인 용어입니다. 즉 '그랜드 슬램'이란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을 한해에 모두 석권했을때만 얻게되는 칭호인 것이지요. 그러나 잭 크로포드는 1933년 유일하게 US오픈에서만 우승하는데 실패하여(준우승) 아깝게 그랜드슬래머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해에 4대 메이저 타이틀을 석권한 안드레 애거시(Andre Agassi)나 프레드 페리(Fred Perry) 또한 진정한 의미의 그래드슬래머가 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현재까지 공식으로 그랜드슬램 칭호를 얻은 선수는 남자의 경우 돈 벗지(1938년 달성), 로드 레이버(62, 69년 2회 달성) 두명뿐이고 여자의 경우는 모린 코넬리(53년), 마거릿 스미스 코트(70년), 슈테피 그라프(88년) 등 3명뿐입니다.
2. <테니스의 전설들> 시리즈는 번역기고문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수많은 매체에서 얻은 정보지식과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 집필되는 것으로서 아래에서 밝힌대로 집필에 참고가 된 부분은 최종회에서 그 참고문헌을 게시할 예정입니다. 전문번역이 아니기 때문에 [출처]가 아닌 [참고문헌]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모린 코놀리(여)
<연재-테니스의 전설들>은 역경속에 전설적 기록을 남기며 후세의 테니스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인물들을 시대별로 고찰, 테니스 애호가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전설적 테니스 선수들 가운데는 은퇴 후 사업 등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테니스 관련 직종에 몸담고 있지요. 존 메켄로(John McEnroe)나 빌리 진 킹(Billy Jean King)처럼 각각 남녀테니스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 매츠 빌란더(Matz Wilander)처럼 유명 선수들의 개인코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돈 벗지(Don Budge)처럼 불의의 사고로 숨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1940년대는 2차세계대전의 여파로 테니스 경기가 위축되었고 50년대에 비로소 활기를 찾았을 때 남자선수 돈 벗지에 이어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한 해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어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모린 코놀리입니다.
모린 코놀리(Maureen Conolly. 1934-1969).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946-1950년에 눈에 띄게 활약했던 여자선수는 미국의 마거릿 듀퐁(M. O. duPont)이었다. 5년간 한해도 거르지않고 최소 한 개씩의 메이저 타이틀을 따내어 이름을 떨쳤던 듀퐁이었지만 유독 호주오픈에만 참가하지 않아서 여성의 첫 그랜드슬램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이다. 당시까지 미국인이나 유럽선수들로서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참가해야하는 머나먼 여정이었기 때문에 호주참가가 쉽지 않았고 호주가 외국 선수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데 인색했던 어려움도 있었다. 듀퐁은 1947-50까지 랭킹 1위였지만 50년대 혜성같이 등장한 모린 코놀리에게 결국 1인자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코놀리는 1934년 9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애고(San Diego)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테니스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였지만 너무도 갸날픈 몸매 때문에 테니스 선수로 대성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1949년, 1950년 2년 연속 미국 주니어 타이틀을 획득하자 미국 테니스계는 16세의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US오픈.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빨강머리 소녀,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17세 소녀가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이미 같은해 프랑스오픈에 우승했던 시어리 프라이(Shirly Fry)였다. 2세트까지 1대1(6:3, 1:6)로 맞섰고 마지막 3세트에서 그 작은 체구의 코놀리는 베이스라인 끝에서 엄청난 괴력을 발휘, 상대를 압도한 끝에 6:4로 경기를 끝내며 생애 처음 메이저 타이틀을 안게 된 것이다. 특히 2세트의 1:6은 그녀가 이후 거둔 메이저 대회 50전 50승 가운데 유일한 세트패가 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모린 코놀리를 가리켜 리틀 모(little Mo)라고 불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미국의 전투함 미주리호를 당시 빅 모(Big Mo)라고 불렀기 때문에 '리틀 모'는 작으면서도 강한 힘을 가진 그녀를 상징하는 애칭이 되었던 것이다.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그녀의 적수는 거의 없었다. 이듬해인 52년 윔블던과 US오픈을 연달아 석권하고 대망의 53년에는 한 해동안 4대 메이저 타이틀을 모조리 휩쓸며 여성으로선 세계 처음으로 "그랜드슬램"의 칭호가 부여된 것이다. 그녀는 다음 해인 54년에도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연달아 제패하여 9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소유하게 된다.
그녀가 따낸 메이저 타이틀 9개는 양적으로만 따지자면 후에 이름을 날린 마거릿 스미스 코트(Margaret Smith Court)나 나브라틸로바(Navratilova), 슈테피 그라프(Steffi Graf)에는 훨씬 못미친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그녀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그녀는 자신이 치른 9번의 메이저대회 결승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 그러니까 준우승의 기록이 없는 결승불패였다는 말이다. 또한 메이저 대회에서 가진 단식 총 50경기 중 단 한 세트 만을 잃었을 뿐이다.(51년 결승) 이뿐 아니라 메이저 타이틀 9개는 모두 연속제패에 의한 것으로서(윔블던 3연속, US오픈 3연속, 프랑스오픈 2연속, 호주오픈 1회) 이는 1951년에서 54년까지 4년동안에만 이루어낸 결과였다. 당시에 어느 유능한 테니스 선수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린 코놀리를 이겨봤느냐고 먼저 물어 그사람의 실력을 평가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렇듯 훌륭한 성적을 낸 그녀에게 암운이 닥친 것은 1954년 그녀의 마지막 메이저 타이틀인 윔블던이 끝난 지 얼마 안된 후였다. 이때는 이미 전성기로서 그녀의 연승가도가 계속되는 때였고 나이도 2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메이저 타이틀을 사냥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졌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승마 중 반대편에서 오던 트럭에 치여 피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낙마,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면서 그녀의 테니스 인생은 막을 내린다. 몇 년후 그녀는 건강을 어느정도 회복하여 결혼까지 할 수 있었고 자라나는 주니어들을 지도하며 살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엔 사고가 아니라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그녀 나이 겨우 35세인 1969년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던 1968년, 테니스인들은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명예의 전당에 그녀의 이름을 올렸으며 후에 그녀의 이름을 딴 대회인 모린 코놀리 브링커컵(Maureen Conolly Brinker Cup)을 개최, 이 대회는 미국과 영국의 주니어 국가대항전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박일균 필자 후기>
1. "테니스의 전설들"에 등장하는 각종 기록들은 단식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복식의 경우는 따로 복식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물선택의 선정 기준은 주로 4대 메이저 대회의 성적과 지명도 등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답글을 주신분들게 감사드립니다. 1편에서 글을 남겨주신 정준영님, 기림님, 김형준님, 조용석님, 서?님, 김동훈님, 류문현님과 2편에서 글을 남겨주신 서원교님, 곽인휴님 그리고 <마스터스컵 인물연구> 최종회에서 글을 남겨주신 양승찬님과 메일을 보내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로이 에머슨
2000년 윔블던 대회. 샘프라스와 래프터의 결승전이 열린 날이었다. 4세트만에 래프터를 제압한 샘프라스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고 샘프라스의 경기를 직접 관전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그의 부모님도 윔블던 관중석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때까지 부모님의 참관을 알지 못했던 샘프라스는 관계자들의 안내로 부모님이 계신 자리로 올라가 아버지 어머니를 차례로 얼싸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날 샘프라스의 눈물과 부모님의 참석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이날이 33년동안 깨지지 않고 있었던 하나의 기록을 갈아치워 테니스의 역사를 다시 쓰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샘프라스는 33년전 호주의 한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가 가지고 있었던 12개의 메이저 단식타이틀 기록을 뛰어넘어 13개의 기록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33년동안 최다 단식타이틀 기록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그의 이름은 다름아닌 호주의 로이 에머슨이었다.
로이 에머슨(Roy Emerson, 1936- ). 그는 1936년 11월 3일 호주 퀸스랜드의 작은 마을 블랙버트(Black Butt)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년시절 육상에 남다른 재질을 보여 가족들도 그가 훗날 육상선수로 대성할 것으로 믿었다. (이는 후에 테니스로 진로를 바꾸고 나서도 100미터 최고기록이 10초.6 이었고 멀리뛰기도 6미터 55 이었으므로테니스로 진로를 바꾸지 않았다면 육상선수로도 성공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에머슨 가족이 시골에서 대도시 시드니로 이사하고 당시 테니스 코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해리 호프만(Harry Hopman)을 만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자신의 주종목을 육상에서 테니스로 바꾼 것에 대해 에머슨은 얼마전 호주의 상징인 캥거루에 빗대어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캥거루는 나보다 빨리 달리지만 나보다 테니스를 잘하는 캥거루는 없다. Jedes Kaenguru laeuft schneller als ich, aber keines spielt besser Tennis"(독일 Tagessport 2001년 11월 3일)
호프만의 테니스 학교에서 서브앤 발리형으로 키워진 에머슨은 60년대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59년부터 랭킹 톱텐에 진입한 그는 61년 US오픈과 호주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메이저 타이틀 사냥에 나선 것이다. 그는 이듬해 62년 그의 동료 로드 레이버(Rod Laver)가 역사상 두번째의 <4대 메이저 한해 달성>을 기록하는 바람에 주춤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63년부터 65년까지 매년 최소 2개씩의 메이저 타이틀을 따내며 랭킹 1위 획득, 호주오픈 5년연속 우승과 프랑스오픈 6년연속 복식우승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66년 한번의 메이저 우승에 그친 그는 67년에 프랑스오픈과 호주오픈에 우승, 그동안 미국의 틸든(W. Tilden)이 가지고 있었던 메이저 단식 타이틀 10개(틸든의 기록은 테니스 초창기 US오픈과 윔블던에서만 거둔 것이었다)를 뛰어넘어 12개를 기록하게 된다.
기록면에서 보면 로이 에머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메이저 타이틀 12개를 뛰어넘은 오늘날의 샘프라스도 프랑스오픈을 석권하는데 실패했지만 에머슨은 서브앤 발리어가 우승하기 힘들다는 프랑스오픈마저 제패(63, 67), 4대 메이저를 모두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호주오픈 5연속 우승(63-67)과 도합 6회우승(61년포함)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뿐만 아니라 단복식 포함하여 총 28개에 이르는 메이저 타이틀도 아직까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불멸의 기록이며 1959-1967년 9회의 데이비스컵 결승에서 8번 우승한 것 또한 기록중의 기록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1964년 프랑스오픈만을 놓쳐 <4대 메이저 대회 한해 달성>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당시 에머슨의 강력한 적수로는 동료인 로드 레이버(레이버에 대해서는 추후 발표예정)였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10년간 이 두명의 호주인이 거둔 메이저 타이틀은 22개. 10년간 전체의 반 이상을 단 두명이서 거둔 것 또한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에머슨은 당시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자기관리에 철저한 선수로 알려져 있다. 테니스를 시작하고부터 코치의 도움없이 철처한 계획에 따라 체력관리를 해왔고 술과 파티, 노래를 좋아했으면서도 테니스 경기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되면 단호하게 거부하는 자기관리형의 인물이었다. 또한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연습하는 연습벌레로 알려졌는데 주로 두명의 복식 상대자들과 연습하는 '투온원 Two on One' 방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연습 뿐만 아니라 실전에서 매치포인트까지 몰리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패배를 조금도 염두하지 않는 강심장의 소유자라는 것을 훗날 그의 라이벌 로드 레이버가 밝힌 바 있다.
60년대 테니스를 동료 로드 레이버와 양분했던 로이 에머슨은 또다른 후배스타들(켄 로스웰 Ken Rosewall, 존 뉴컴 John Newcome)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앤토니 에머슨(Anthony Emerson)도 미국에서 테니스 선수로 성장했는데 특히 1978년 미국 하드코트 챔피언쉽에서 우승, 최초의 부자간 우승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국제 명예의 전당 선정 위원회는 전설적 기록을 남긴 로이 에머슨의 업적을 기려 1982년 그의 이름을 등재하였고 에머슨은 현재에도 로드 레이버와 함께 호주 테니스계의 '큰 손'역할을 하면서 호주 테니스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박일균 필자 후기>
다음회엔 마거릿 스미스 코트(M. S. Court, 여)와 로드 레이버(Rod Laver)가 연달아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어서 계획되어 있는 선수들로는 빌리진 킹(Billy Jean King, 여), 켄 로스웰(Ken Rosewall)과 존 뉴컴(John Newcome), 지미 코너스(Jimmy Conners), 비욘 보그(Bjorn Borg), 크리스 에버트(Chris Evert, 여), 나브라틸로바(M. Navratilova, 여), 존 메켄로(John McEnroe) 등으로 이어지며 계획이 도중에 변경되어 또 다른 인물이 추가되거나 삭제될 수 있음도 알려드립니다. 기록결과 등을 2차례 이상 검산하고 글을 올리기 때문에 집필에 적지 않은 시간이 듭니다. 이 때문에 하루에 한번씩 올리지 못하고 현재 2-3일에 한번씩 올리고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마거릿 스미스 코트(여)
60년대 테니스는 역시 남녀를 통틀어 호주의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로이 에머슨(Roy Emerson)과 로드 레이버(Rod Laver)가 60년대 남자 테니스계를 양분했다면 여자부에서는 호주의 마거릿 스미스 코트(Margaret Smith Court)와 미국의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이 여자 테니스를 양분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빌리 진 킹의 경우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활약했던 선수이므로 실제 60년대를 대표하는 전설적 여자선수는 마거릿 스미스 코트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스미스 코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남녀선수를 막론하고 아직까지도 스미스 코트의 메이저 대회 성적을 능가하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호주의 로이 에머슨이 기록의 황태자였다면 같은 국적의 마거릿 스미스 코트는 기록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마거릿 스미스 코트(Margaret Smith Court, 1942- ).
마거릿 스미스 코트는 1942년 7월 16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즈의 앨버리(Albury)에서 태어났다. 소도시에서 자란 스미스 코트는 어릴적부터 코치의 도움없이 스스로 체력관리와 개인연습을 해온 인물로 알려졌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왼손잡이 였으나 테니스를 치기 시작하면서 곧 오른손으로 적응을 해왔고 큰 키 덕분에 여자로서는 드문 서브앤 발리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18세인 1960년 호주오픈에 도전장을 내밀어 결승에서 장 레한(Jan Lehane)을 상대로(결과 7:5, 6:2) 메이저 첫 우승을 따내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테니스 역사상 전례없는 우승행진이 시작된다. 그녀의 메이저 우승기록만 해도 이 지면에 모두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다음과 같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 호주오픈(60-66년 7년연속 , 69-71년 3년연속, 73년, 도합 11회 우승)
- 프랑스오픈(62, 64, 69, 70, 73년, 도합 5회 우승)
- 윔블던(63, 65, 70, 도합 3회 우승)
- US 오픈(62, 65, 69, 70, 73, 도합 5회 우승)
이렇듯 그녀는 메이저 대회 단식 타이틀만 24개(복식/혼복 포함 66개)를 따내었고 이 기록은 남녀를 통틀어 현재까지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 되었다. 또한 70년에는 모린 코놀리에 이어서 여자로서는 역사상 두번째로 그랜드 슬램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깝게 그랜드 슬램을 놓친 것도 4회에 이른다(62, 65, 69, 73). 그녀는 특히 동료인 켄 페쳐(Ken Petcher)와 혼합복식에서도 그랜드슬램을 이룩(63년), 사상 최초로 단식뿐 아니라 복식에서도 그랜드슬램을 이룩한 선수가 되었다. 그녀의 기록은 타이틀 수 뿐만 아니라 랭킹과 승률에서도 나타난다. 1962년부터65년까지 4년간 연속 랭킹 1위, 69, 70, 73년에도 1위를 기록하였으며 70년(104승 6패)과 73년(102승 6패)에 이룩한 그녀의 총 전적 또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녀의 최고의 매치는 1970년 윔블던 결승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 그녀의 강력한 라이벌로 성장한 미국의 빌리 진 킹을 상대로 2세트만의 승리를 기록하지만 1세트의 14:12, 2세트의 11:9라는 경기 결과는 이날 결승전이 관중들에게 얼마나 땀을 쥐게하는 빅 매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타이브레이크가 도입되지 않았던 그 당시 총 46게임이나 치른 이 결승전은 남자의 5세트 경기결과와 맞먹는 것으로서 두 선수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혈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스미스 코트는 큰 키를 이용한 강력한 서브와 발리가 주특기이며 특히 지구력과 근성이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었던 1967년, 그녀는 배리모어 코트(B. Court)와 결혼하면서 선수생활을 잠시 중단하게 된다. 때문에 67년과 68년 2년간은 메이저 타이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랭킹도 곤두박질, 주위에서는 그녀가 69년(당시 27세)부터 선수생활을 재개했을 때 이미 전성기가 지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윔블던을 제외한 3대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면서 그녀의 우승행진은 멈추지 않았고 70년 한해에 4대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면서 여자테니스의 천하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이어 71년 두 개의 메이저 대회(프랑스오픈, 호주오픈)를 석권한 후 또 다시 선수생활을 중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이제는 결혼때문이 아니라 임신을 했던 것이다. 임신과 출산기간이었던 1972년에 모든 경기에 참가할 수 없었던 그녀는 첫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1973년에도 선수생활을 재개하였으며 또다시 윔블던을 제외한 3대 메이저 타이틀을 따내는 뒷심을 발휘하고 이듬해 은퇴를 결정, 스미스 코트의 시대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당시 결혼과 임신기간이 없었다면 그녀의 24개 메이저 단식타이틀에 5-8개는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메이저대회 24개의 단식 타이틀과 42개의 복식/혼복 타이틀이라는 전인미답의 고지를 남기고 홀연히 테니스계를 떠난 마거릿 스미스 코트. 그녀는 1974년 은퇴와 더불어 두 아이를 더 출산하면서 테니스의 여왕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왔으며 1979년에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되었다. 마거릿 스미스 코트가 물러날 무렵, 호주 여자테니스는 이본 굴라공(Evonne Goolagong)이라는 또 하나의 스타를 배출하게 되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침체기에 빠지며 미국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박일균 필자 후기>
-"테니스의 전설들" 다음 편은 남자 두번째의 그랜드슬래머 로드 레이버편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지난 로이 에머슨편의 필자후기에서 오타를 발견하여 정정합니다.
빌리진 킹(Billy Jean King->Billie Jean King)
로드 레이버
매년 초 호주오픈이 열리는 맬버른 경기장.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여러 해동안 센터코트로 사용해 왔던 한 웅장한 경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경기장의 이름은 로드 레이버 아레나(Rod Laver Arena). 호주인들은 60년대 남자테니스계를 평정했던 자국의 전설적인 인물 로드 레이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경기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드 레이버는 어떠한 전설을 남겼길래 로이 에머슨("테니스의 전설들 제4편" 참조)과 함께 호주 테니스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을까. 그것은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돈 벗지(제2편 참조) 이후 사상 두번째로 그랜드슬램의 자리에 오른 업적, 호주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차지했던 업적, 그리고 남녀선수 통틀어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무이하게 두번이나 그랜드슬램의 자리에 오른 업적 때문일 것이다.
로드 레이버(본명: Rodney George Laver, 1938- ).
그는 1938년 8월 9일 호주 퀸스랜드의 록햄턴(Rockhamton)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잔병에 시달려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었고 체구 또한 스포츠맨으로 성장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가 후에 세계 테니스를 평정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소년기 자신의 잔병치레를 극복하기 위하여 운동에 전념하기로 하였고 마침 테니스 코트를 소유하고 있었던 그의 부모님(부모 역시 론테니스 선수 출신이다.) 덕택에 테니스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의 부모님은 당시 호주 최고의 코치였던 해리 호프만(제4편 참조)에게 자기 아들의 천재성을 문의하게 되며 호프만의 눈에 든 레이버는 15세에 이르러 자신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호프만의 제자로 들어와 본격적인 테니스 수업을 받게 된다.
호프만의 코치하에서 레이버는 고속성장을 이룬다. 특히 레이버의 연습장면을 꼼꼼히 체크해 온 호프만은 레이버가 왼손잡이 선수로서 당시 보기 드문 강서브를 선보이자 그를 두고 '록햄턴의 로켓(Rockhamton Rocket)'이라 불렀으며 이 닉네임 '로켓'은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하였다. 레이버는 17세에 이르러 호주의 국가대표에 발탁되며 해외 첫 원정경기에 나서(미국 주니어 챔피언쉽) 우승하는 등 앞으로의 '큰 일'에 대비하게 된다. 1959년 그의 나이 21세에 프랑스 오픈 준우승(혼합복식), 윔블던 준우승(단식, 혼합복식), 호주오픈 우승(복식)과 준우승(혼복)의 성적을 이뤄내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960년에 대망의 첫 메이저 타이틀(1960년 호주오픈)을 따내면서 그는 호주 테니스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이때부터 호주의 또다른 수퍼스타 로이 에머슨과 10년간 라이벌 관계가 된다.
61년 윔블던에서 자신의 두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따낸 그는 그 이듬해인 62년 호주테니스인들의 숙원이었던 그랜드슬램 달성에 성공, 역사상 두번째, 남녀 통틀어 세번째의 그랜드 슬래머가 된다.(38년 돈 벗지, 53년 모린 코놀리(여))
그의 그랜드스램 위업은 호주인으로서는 최초일뿐 아니라 테니스 라이벌 관계에 있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대 사건이었다. 설명: 이때부터 세계 남자테니스는 호주가 완전히 장악, 로드 레이버, 로이 에머슨, 켄 로스웰, 존 뉴컴으로 이어지며 최초의 흑인 메이저 우승자인 미국의 아더 아쉐(Arthur Ashe, 68년 US Open, 70년 호주오픈, 75년 윔블던 우승)를 넘어 지미 코너스(Jimmy Conners)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된다.
한참 전성기를 누릴 무렵 그는 라이벌 로이 에머슨에게 메이저 대회 챔피언 자리를 내놓게되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63년부터 67년까지 5년간 단 한차례의 메이저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68년, 30세의 나이에 달한 그는 윔블던에서 한차례 우승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의 나이 31세인 그 이듬해 1969년, 또 한번의 기적을 호주인들에게 선사하게 된다. 이 해에는 자신의 후배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켄 로스웰, 존 뉴컴을 상대로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연달아 제패하고, US 오픈, 호주오픈 마저 연속으로 제패함으로써 한 사람이 한번 하기도 힘든 그랜드슬램 위업을 62년에 이어 두번이나 이루고 만다. 한 사람이 이루어낸 두번의 그랜드 슬램은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로드 레이버가 유일하게 세운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게 된다.
첫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이루었던 62년까지는 아마추어로 활동하다가 63년에 프로로 전향했던 로드 레이버는 '로켓'으로 불리우는 가공할만한 서브 뿐 아니라 다양한 구질을 사용하여 테니스를 정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특히 기본이 되는 포핸드, 백핸드 스트로크, 그리고 서브와 발리 뿐 아니라 전후 좌우의 모든 방향에서 톱스핀, 슬라이스, 로브 등을 구사하여 모든 테니스 기술에 탁월한 감각을 가졌던 인물이다. 후에 이름을 떨친 스웨덴의 전설 비욘 보그(Bjorn Borg)도 자신이 로드 레이버의 테니스 기술을 모델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기록은 그랜드슬램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1971년에 프로 테니스 선수로는 처음으로 100만 달러가 넘는 총상금(요즘은 메이저 대회 하나만 우승해도 100만달러가 넘으나 당시시세 등을 고려하면 기록적인 상금이었다.)을 기록했으며, 1978년 지미 코너스가 그 기록을 깰 때까지 테니스 선수로는 사상최고의 상금 수입을 올려 프로선수들의 상금수입 경쟁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42세 되던 1980년, 당시 유명 테니스 선수들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30만달러짜리 호화저택을 구입하면서 프로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부와 명예의 표본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1976년 월드팀 챔피언쉽에서 샌디애고 팀으로 출전, 공로상을 받은 후 선수생활을 접어두고 은퇴, 그후 호주 테니스 선수들의 후진 양성에 힘썼다. 현재 그가 주요 대회의 결승 시상인으로 초청, 귀빈급 인사로 대접받는데서 테니스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위상을 엿볼수 있으며 호주 테니스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호주 테니스 역사의 획을 긋는 훌륭한 업적으로 말미암아 1981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박일균 필자 후기>
"테니스의 전설들"만을 따로 모아서 쉽게 보기를 원하실 경우, 게시판 초기화면의 <제목검색>란에서 "전설"을 기입하고 엔터를 치시면 현재까지 발표된 "테니스의 전설들"을 간추릴 수 있습니다.
빌리 진 킹
요즘 여자 테니스의 환경을 보면 과거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테니스의 기술도 과거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현란한 기술을 사용하는 선수들이 늘었고 과거와는 달리 흥미로운 여자 테니스 경기를 보려는 관중들 또한 부쩍 늘었다. 상금 또한 남자와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되는 추세이며 WTA의 조직적 관리로 인하여 수준높은 투어 대회가 많이 생겨났을 정도이다. 이처럼 남자 테니스에 비해 열악했던 여자 테니스의 환경을 남자 수준으로 끌어 올린 사람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있다. 현재 세계 여자 테니스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고 있는 그 인물은 WTA(Women's Tennis Association)의 초대 회장을 지냈던 빌리 진 킹이다.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 1943- )
빌리 진 킹(결혼전 이름은 빌리 진 모핏, Billie Jean Moffitt)은 1943년 11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 비치(Long Beach)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롱 비치의 소방관이자 광적인 스포츠 팬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테니스를 접할 수 있었고 그녀의 남동생 또한 일찌감치 야구에 재능을 보였다.(남동생은 후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투수로 활약했다.) 그녀가 세계 무대에서 첫 선을 보인 것은 60년대 초반. 당시 남자테니스는 호주의 로드 레이버와 로이 에머슨의 무대였고 여자 또한 호주의 마거릿 스미스 코트가 독주하고 있었던 때였다. 미국으로서는 호주의 아성을 무너뜨릴 강력한 경쟁자가 필요하였고 빌리 진 킹은 그러한 미국의 자존심을 지켜줄 유일한 선수로 부상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 만 18세도 안된 1961년, 윔블던 복식에서 첫 메이저 타이틀을 따내면서 새롭게 메이저 무대에 등장한 그녀는 60년대 중반까지는 단식보다 복식에서 큰 활약을 보이며 향후 스미스 코트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62년 윔블던 복식 우승, 63년 준우승, 65년 우승/ US 오픈 복식 62년 준우승, 64년 우승) 하지만 단식에서는 번번히 실패를 거듭, 63년 윔블던에서 기회를 잡았지만 스미스 코트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머물렀고 65년 US 오픈에서도 스미스 코트에게 우승을 넘겨주어야만 했다. 그녀의 첫 타이틀은 66년 윔블던에서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6회의 메이저 타이틀을 보유한 마리아 부에노(Maria Bueno)를 상대로 첫 단식 우승을 차지하면서 여자 테니스는 비로소 빌리 진 킹의 무대가 된 것이다. 67-68년은 스미스 코트가 결혼과 출산으로 선수생활을 일시 은퇴하고 있었을 때였기 때문에 빌리 진 킹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녀는 66년부터 68년까지 3년 연속 윔블던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었고 67년 US 오픈 우승, 68년 호주오픈 우승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녀는 스미스 코트가 69년 복귀하여 70년에는 그랜드슬램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자 잠시 주춤하게 되었지만 71년부터 75년까지 8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새로이 추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녀의 메이저 대회 성적은 단복식 포함하여 총 39개(단식 12개 복식/혼복 27개). 이는 스미스코트와 나브라틸로바에 이어 역대 3위의 성적이 되었다. 그녀의 메이저 단식 타이틀 12개는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거둔 것이었지만 복식을 포함하면 60년대 초반에서 80년까지 장장 20년동안 거둔 것이어서(61년 윔블던 복식, 80년 US 오픈 복식) 그녀의 활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인지 알수 있다. 특히 63년에서 80년에 이르는 18년동안 연속으로 세계 랭킹 톱텐에 올랐으며 그중 5번의 랭킹 1위(66, 67, 68, 71, 74)를 차지한 바 있다. 그녀는 나이 40세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던 1983년에도 랭킹 13위를 기록하였다.
그녀는 3만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한 1973년, 전윔블던 챔피언이었던 보비 리그즈(Bobby Riggs)와 성대결을 펼쳐 세트 3:0으로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1974년에는 미국의 국가대표팀 감독겸 선수로 활약하여 미국팀에 여러 차례 승리를 안겨주었고 특히 96년 아틀랜타 올림픽에서도 감독을 맡아 여자 테니스에 걸린 금메달 2개(단식: 데이븐 포트, 복식: 페르난데스 조)를 모두 따내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선수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빌리 진 킹은 앞서 설명한 대로 여성 테니스의 권익 향상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선수생활이 한창이었던 1974년 여성 테니스 협회(WTA)의 발기인중 한사람으로 초대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이후 기업가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여자 테니스 선수권대회가 별도로 개최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70년대 후반에는 여성 스포츠(Women's Sports)를 공동 발행, 그동안 남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스포츠의 환경을 여성쪽으로 움직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에이즈 퇴치 재단을 후원하여 스포츠인으로서의 사회봉사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현재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는 빌리 진 킹은 세계 여자 테니스를 움직이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녀의 꿈은 남자와 완전히 동등한 여자 테니스의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5세트 경기를 하는 남자에 비해 3세트 경기를 하는 여자 테니스의 상금이 지나치게 많고 관중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일각의 비난에도 불구, 현재 여자 테니스의 수준과 관중들의 관심이 많이 향상되었음을 예로 들면서 여자 테니스 선수들도 5세트 경기를 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쳐 여성의 권익향상에 관한한 절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하였다. 실제로 과거의 단순한 볼거리만을 제공했던 여자 테니스가 90년대 이후에 이르러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둔 것은 순전히 그녀만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수시절의 업적과 그동안 여성 테니스계에 끼친 공로로 인하여 1987년 명예의 전당에 그녀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끝.
지미 코너스
로드 레이버와 로이 에머슨이라는 두명의 걸출한 스타를 앞세워 60년대 남자 테니스를 좌지우지했던 호주의 테니스는 7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물론 그들의 후배인 존 뉴컴(John Newcome)과 켄 로스웰(Ken Rosewall)이 명맥을 이어나가 70년대 초까지 호주테니스의 위상을 드높이긴 하였으나 이젠 더 이상 한사람, 혹은 두 사람이서 메이저 타이틀을 싹쓸이 하는 시대는 오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1968년부터 모든 메이저 대회가 오픈화 됨으로써 바야흐로 세계 남자 테니스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70년대에 두드러지게 활약했던 인물들은 앞서 말한 존 뉴컴(메이저 타이틀 7개)과 켄 로스웰(메이저 타이틀 4개)이외에도 흑인 최초로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던 미국의 아더 애쉬(Arthur Ashe, 메이저 타이틀 3개), 그리고 컴퓨터 랭킹 집계가 시작된 후 최초로 1위에 올랐던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세(Ilie Nastase, 메이저 타이틀 2개)와 남미 최초로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아르헨티나의 길레르모 빌라스(Guillermo Vilas, 타이틀 4개) 등이다. 그러나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의 남자 테니스는 대략 3명의 지배 체제였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들이 바로 남자 테니스의 3인방으로 불리웠던 지미 코너스, 비욘 보그, 그리고 존 메켄로이다. 그들 중 제일 먼저 돌풍을 일으켰던 지미 코너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미 코너스(본명:James Scott Conners, 1952- )
지미 코너스는 1952년 9월 2일, 미국 일리노이주 빌레빌(Belleville)에서 태어났다. 그의 테니스 인생은 그의 나이 겨우 2살 때 어머니가 굴려주는 테니스공을 맞추면서부터 시작된다. 유년기 그에게 유일한 행복은 두 손으로 어렵사리 치켜든 라켓으로 구르는 공을 쳐내는 일이었고 이는 다른 장난감 놀이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한 유년기의 테니스 연습은 그가 후에 테니스 선수로 대성하게 되는 큰 자산이 되었다. 왼손잡이인 그는 8살 때인 1961년에 전미 11세 이하 소년 테니스 대회에 참가하면서 테니스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청소년기에도 크고 작은 대회에 출전, 장래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선수를 꿈꾸며 대선수로서의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는 1971년 만18세에 이르러 로스엔젤레스의 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 대표로 발탁되어 전미 대학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때부터 미국 테니스계는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호주가 장악하고 있던 남자 테니스계에 새바람을 일으킬 미국선수로 떠오르게 된다. 이듬해인 1972년에 프로로 전향하면서 자신의 첫 투어 타이틀(플로리다 잭슨빌 대회)을 획득하게 되고 1973년엔 윔블던 복식에서 우승하는데 성공한다. 1974년엔 호주오픈과 윔블던, US오픈을 연달아 제패, 본격적인 메이저 타이틀 사냥에 나서게 되며 이때부터 새로이 등장한 스웨덴의 비욘보그, 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존 메켄로와 함께 3인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그가 획득한 메이저 타이틀은 8개(복식포함 10개)이며 준우승도 7회에 이른다. 특히 US오픈 5회의 우승(74, 76, 78, 82, 83)은 20년대 미국의 빌 틸든(B. Tilden) 이후 최고의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메이저 타이틀 획득 수로만 보면 이전의 빌 틸든(10개)이나 로이 에머슨(12개), 그리고 로드 레이버(11개)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를 테니스의 전설적 인물중 한명으로 꼽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우선 72년 첫 투어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1989년 이스라엘에서 마지막 투어 타이틀을 획득할 때까지 투어 무대에서 무려 109번이나 우승한(준우승 54회)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는 역대 최고의 기록으로서 이반 랜들(94회 우승)이나 존 메켄로(77회 우승), 그리고 피트 샘프라스(63회)와 비욘 보그(62회)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그는 또한 생애통산 401회의 토너먼트 출장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설명: 401회라면 어느정도일지 생각해보자. 현재 철인이라 불리우는 러시아의 카펠니코프가 1년에 30회가 조금 넘는 출장기록(상위랭커들은 보통 20회에서 30회 사이)을 이어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카펠니코프와 같은 선수가 1년에 30토너먼트에 참가, 10년을 계속 뛰어도 300회에 불과하다. 즉 14년을 이어가야 400회를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통산 1337승 285패(승률: 82%)를 기록한 지미 코너스에게도 불운했던 시기가 있었다. 1974년 미국인으로서는 돈 벗지에 이어 두번째, 통산 세번째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기회를 가졌지만 아깝게도 프랑스 오픈에 출전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출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출전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당시 코너스는 WTT(World Team Tennis)에서 주관하는 경기에 참여함을 골자로 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는데 그동안 WTT에 반대해왔던 ATP와 프랑스 테니스협회는 WTT에 가입한 선수들의 프랑스 오픈 출전 자격을 박탈하기로 했다. 이에 흥분한 지미 코너스는 ATP 처사가 비합법적이라는 이유로 ATP와 회장이었던 아더 애쉬를 상대로 10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1975년 소송 상대였던 아더 애쉬와 윔블던 결승에서 만나 패하게 되자 갑자기 소송을 취하, 결국 ATP에 굴복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고 만다. 그가 74년 프랑스 오픈에서 참가자격이 박탈되지만 않았다면 사상 3번째의 그랜드 슬래머가 탄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미 코너스는 109회의 투어무대 우승 기록 이외에도 1973년 컴퓨터 집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랭킹 부문에서 눈부신 기록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73년 첫 랭킹 1위에 올랐던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세(40주연속 1위), 두번째로 1위를 달성한 호주의 존 뉴컴(8주연속 1위)에 이어 세번째로 랭킹 1위에 올랐을 당시 160주 연속 1위(74년 7월-77년 8월)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고 마지막으로 1위를 차지했던 83년 7월까지 통산 268주 1위라는 전례없는 기록을 남겼다.(이 기록은 후에 이반 랜들(270주)과 피트 샘프라스(276주)에 의해 갱신되었다.) 또한 코너스는 역대 최장의 테니스 선수생활을 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1973년 컴퓨터 랭킹 집계가 시작된 이후 1996년 아틀란타 대회에서 1회전 탈락할 때(1304위)까지 그의 이름이 등재된 바 있다. 그의 나이 44세까지 20년 이상 현역선수 생활을 한 셈이다.
1998년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그는 은퇴후에도 각종 시니어 투어에 참가하면서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현재 자신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빌레빌에서 살고 있으며 가족으로는 아내와 1남 1녀가 있다.
[제8편 끝] 계속해서 [제9편]에서는 크리스 에버트나 비욘 보그로 이어집니다
끝.
크리스 에버트(여)
70년대 초 지미 코너스가 두각을 보일 무렵까지 여자 테니스 무대에서는 호주의 마거릿 스미스 코트와 미국의 빌리 진 킹이 주요 메이저 타이틀을 독식하다시피 하였다. 이어서 여자 테니스의 2인 지배체제에 도전장을 내밀고 새롭게 가세한 인물들은 호주의 이본 굴라공과 미국의 크리스 에버트였다. 그러나 이본 굴라공은 자국에서 열리는 호주오픈(74, 75, 76, 77 우승)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번번히 결승의 문턱에서 좌절해야했으며 스미스 코트에 이은 호주의 전성기를 구가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관중들의 시선은 빼앗긴 자존심을 회복한 미국의 빌리진 킹에 이어 70년대 초부터 80년대 말까지 여자테니스를 주도해온 새로운 인물에게 모아졌다. 그녀가 바로 역대 여자 테니스인들 중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크리스 에버트였고 그녀는 70년대 말부터 등장한 체코출신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후에 국적을 미국으로 바꾸었다.)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관계를 이루며 여자 테니스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다.
크리스 에버트(Chris Evert, 1954- )
그녀는 1954년 12월 21일 미국 플로리다주 로우더데일(Lauderdale)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지미 에버트(Jimmy Evert, 1947년 카나다 오픈 챔피언 출신)가 소유한 테니스 라켓을 장난감 삼아 놀기 좋아했고 이때부터 아버지는 딸아이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어린 크리스를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딸아이를 지도할 무렵부터 그녀가 원핸드 백핸드에 길들여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체구가 작고 힘이 약했던 크리스는 투핸드 백핸드를 고집하게 되며 오랫동안 길들여진 그녀의 투핸드 백핸드로 각종 주니어 대회에서 성과를 보이자 아버지도 더 이상 반대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는 아버지의 지도하에 일취월장하여 1970년 노스케롤라이나의 한 토너먼트에서 여자 테니스의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 당해년도에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하고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한 바 있는 세계 랭킹 1위 마거릿 스미스 코트의 난공불락에 가까운 아성을 만15세를 겨우 넘긴 크리스 에버트가 무너뜨렸던 것이다. 7:6, 7:6(1970년부터 Tie-Break 적용)으로 끝난 이 경기는 향후 여자 테니스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그녀는 이 사건이 있은 3년 후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에서 준우승하면서부터 메이저 타이틀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인 1974년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연달아 제패, 크리스 에버트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게 되었다.
1974년부터 1986년까지 그녀가 거둔 메이저 타이틀은 18개(호주오픈 2회, 프랑스오픈 7회, 윔블던 3회, US오픈 6회)이며 준우승만도 16회에 이른다. 이는 메이저 단식무대에서 자그마치 34번이나 결승에 올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오픈 7회 우승(74, 75, 79, 80, 83, 85, 86)은 역대 최다 우승으로 기록되었고 74년부터 86년까지 13년간 매년 최소 한 개씩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것도 그녀 이외엔 아직까지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또한 71년부터 83년까지 13년간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4강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테니스의 전설적 인물로 남기에 충분하다 할 수 있겠다.
여자 테니스계에 남긴 그녀의 눈부신 업적은 메이저 대회 뿐만이 아니다.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거의 20년간 현역 선수생활을 했던 그녀는 메이저 타이틀을 포함, 총 157회의 우승을 기록(이후 167회를 기록한 나브라틸로바에 의해 갱신됨)하여 당시까지 최다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가 되었으며 총 1309승 146패(승률 89.9%)의 전적을 남겨 최고 승률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75년부터 81년까지 7년 연속 세계랭킹 1위에 올랐으며 특히 72년부터 89년까지 장장 18년간 4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최장의 상위랭커를 기록한 사실도 테니스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여자 테니스의 양상은 그녀와 나브라틸로바의 대립구도였다. 오랜기간동안 이루어진 그녀와 나브라틸로바의 라이벌간 매치는 세계 테니스 매니아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되어 여자 테니스 또한 같은 시기 남자 테니스의 지미 코너스-비욘 보그-존 메켄로의 라이벌 매치와 함께 최고의 라이벌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을 때인 1979년 동료 테니스 선수인 존 로이드(John Lloyd)와 결혼하여 이후 크리스 에버트 로이드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존 로이드와 8년간의 결혼생활 후 파경을 맞게 된다. 이혼의 아픔을 뒤로한채 1988년에는 선수로서 유일하게 찾아온 올림픽 메달의 꿈을 안고 서울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지만 메달 획득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곧이어 동계올림픽 스키 선수출신인 앤디 밀(Andy Mill)과 재혼, 90년 이후 세 아들을 낳고 현재 플로리다주 보카 레이턴(Boca Raton)에서 살고 있다.
1995년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된 그녀는 현재 NBC-TV의 스포츠 해설가로도 맹활약하고 있으며 보카 레이턴에서 열리는 "크리스 에버트 테니스 클래식"에 매년 초청인사로 초대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IMG그룹과 합작하여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자신이 공동 운영하는 [크리스 에버트 테니스 아카데미]를 설립, 유능한 주니어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재 빌리 진 킹, 팸 슈라이버, 나브라틸로바와 함께 선수 출신으로서 미국 여자 테니스를 움직이는 4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9편 끝] 곧이어 제10편에서는 비욘 보그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비욘 보그
동계 스포츠의 강국 스웨덴이 오늘날 테니스의 강국으로 우뚝 선 것은 불과 20여년 전이었다. 스웨덴은 현재 노만, 요한슨, 엔크비스트, 그리고 복식의 강자인 비요르크만과 신세대 기수인 빈시게라 등 호화군단을 자랑하고 있고 80년대엔 매츠 빌란더와 스테판 에드버그가 메이저 타이틀을 여러 번 석권하여 스웨덴의 위상을 드높인 바도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까지 스웨덴은 테니스의 불모지와도 같은 나라였다. 비록 스벤 다비드손(Sven Davidson)이 스웨덴 출신으로서 프랑스오픈(1957년)을 한차례 제패한 바 있지만 그때까지 스웨덴의 인기 스포츠는 전통적으로 스키를 중심으로 한 동계스포츠였고 테니스는 비인기종목으로서 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바로 이때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미국-호주의 구도에 식상함을 느낀 테니스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이가 있었다. 미국의 지미 코너스가 호주에게 빼앗긴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을 무렵인 70년대 초반, 스웨덴의 한 10대 소년이 이후의 세계 남자 테니스 판도를 바꾸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비욘 보그(Bjorn Borg, 1956- )
비욘 보그는 1956년 6월 6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멀지않은 한 작은 도시 쇠데르텔리에(Sodertaljie)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의 그가 테니스에 현혹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 였다. 그가 9세 되던 해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소규모 탁구대회에서 상품으로 받은 테니스 라켓을 집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린 비욘이 아버지로부터 라켓을 건네 받고서 테니스와의 첫 만남을 이룬 것이다. 당시 아이스하키에도 재능이 있었던 어린 비욘은 방과후 매일 3시간동안 훈련해야 하는 아이스 하키를 그만두고 하키에서 배운 기술을 테니스에 접목시키기 시작한다. 비욘보그의 투핸드 백핸드와 육중하고 날카로운 톱스핀 기술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손목의 유연성을 확보하기위해 탁구선수들의 기술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린 비욘이 테니스 선수로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당시 눈과 얼음의 나라 스웨덴에서는 비인기종목인 테니스보다는 스키나 아이스하키 등의 동계종목이나 축구와 같은 인기스포츠에서 성공할 확률을 더 높게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전직 스웨덴 데이비스컵팀 감독이였던 레나트 베렐린(Lenart Bergelin)은 우연히 한 초등학교에서 비욘 보그의 플레이를 눈여겨 보게 된다. 베렐린은 여태껏 주니어 선수들에게서 보지 못한, 양손 백핸드와 포핸드로 처리하는 엄청난 톱스핀을 비욘 보그에게서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강력한 톱스핀에 타점을 찾지 못한 상대자들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비욘보그가 13세 되던 해, 전국 18세 이하 주니어 대회에서 자신보다 너댓살이나 많은 형들을 물리치고 주니어 챔피언에 오르면서 '테니스 신동'의 기적은 시작된다. 이미 스웨덴의 모든 주니어 대회를 석권하고 주니어 중에서 적수가 없다고 판단한 비욘 보그는 이듬해 국제 무대에 나서 미국 마이애미의 오렌지 보울 주니어 대회에서도 돌풍을 일으키며 국제 주니어 타이틀을 획득한다. 그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오렌지 보울에서의 우승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1971년 윔블던 주니어 대회에서 또다시 우승하면서 여실히 증명된다. 이 때부터 세계 테니스계는 금발의 테니스 신동 비욘 보그를 주목하게 된다. 보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만을 상대하여 승리했으며 1977년 21세에 이르기까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선수에게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의 나이 16세인 1972년에는 비로소 스웨덴 데이비스컵 대표에 발탁, 스웨덴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가 되었다.
1974년 그의 나이 만18세를 코앞에 두었을 무렵, 4대 메이저 대회를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컸던 이탈리아 대회에서 최연소의 나이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타이틀 장정이 시작된다. 그는 당해 프랑스 오픈에서 클레이코트의 전문가였던 스페인의 마누엘 오랑테스(Manuel Orantes, 75년 US오픈 우승자)와 결승에서 만나 두세트를 2:6, 6:7로 선취당해 패색이 짙었지만 특유의 톱스핀을 앞세워 나머지 세트를 6:0, 6:1, 6:1로 가볍게 제압, 자신의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 역시 프랑스오픈 사상 최연소 타이틀이었다.(후에 매츠 빌란더와 마이클 창에 의해 갱신됨) 이듬해에도 아르헨티나의 길레르모 빌라스(Guillermo Vilas)를 세트 3:0으로 일축하면서 프랑스오픈 2연패에 성공하였고 1976년에는 전 세계랭킹 1위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세를 제압하고 처음으로 윔블던 왕자에 올랐다. 이후 77, 78, 79, 80년에 윔블던 연속 우승에 성공, 오픈시대 이후 최초로 윔블던 5연속 패권을 차지하였으며 78년부터 81년까지 프랑스 오픈에도 4연속 우승하면서 도합 6회의 프랑스오픈 타이틀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작성하게 된다. 특히 그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존 메켄로를 상대로 5세트(1:6, 7:5, 6:3, 6:7, 8:6)접전 끝에 승리한 80년 윔블던 결승은 4세트의 타이브레이크가 16:18로 끝났을 만큼 윔블던 사상 최고의 라이벌 대결이었다.
비욘 보그의 메이저 타이틀 기록은 총 11개 -당시까지 로이에머슨(12개), 로드 레이버(11개)에 이어 공동2위 기록- 이다. US오픈 결승에도 4번이나 올랐지만 그의 라이벌인 지미 코너스와 존 메켄로에게 각각 2차례씩 빼앗겨 US오픈의 타이틀은 없고 호주오픈도 1974년 단한차례만 출전하였기 때문에 호주오픈 타이틀도 없다. 단지 윔블던과 프랑스 오픈에만 우승했을 뿐인데도 많은 테니스 전문가들이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꼽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먼저 미국이나 호주처럼 선진 테니스 환경에서 자란 선수가 아니었다. 눈덮인 환경이 대부분인 척박한 토양 스웨덴에서 테니스를 시작하였고 테니스 라켓 제조기술의 향상으로 남들이 점점 가볍고 견고한 메탈 프레임 라켓을 사용했을 때도 육중한 우드라켓(wood raquet) 하나만을 고집하여 세계를 평정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는 또한 톱스핀이라는 기술을 후세의 세계적 선수들에게 일반화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톱스핀을 사용한 선수들이 많았고 비욘보그도 이전의 로드 레이버의 톱스핀 기술을 모델로 삼았지만 우드라켓에 80파운드에 달하는 텐션으로 스트링을 매 톱스핀의 가공할 위력을 처음으로 선보인 인물이 바로 비욘 보그였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3연속 패권을 누리기도 힘들다는 프랑스오픈에서 최초로 4연패(78-81)를 이루었고 윔블던 5연패(76-80) 또한 기록적인 것이었다. 클레이 코트에서 치러지는 프랑스 오픈과 잔디에서 치러지는 윔블던을 동시에 석권했다는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해설: 통설대로 베이스 라이너가 유리한 프랑스오픈과 서브 앤 발리형이 유리한 윔블던은 완전히 대조적인 경기 스타일로 게임을 운영해 나아가야 한다.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의 한해 동시 석권(78, 79, 80)은 69년 로드 레이버 이후 지금까지 비욘 보그가 유일하다. 코너스, 메켄로, 랜들, 빌란더, 에드버그, 베커, 샘프라스도 이루지 못했으며 안드레 애거시가 유일하게 서로 다른해(92년 윔블던, 99년 프랑스오픈)에 성취한 바 있다.]
더욱 더 놀랄만한 것은 그가 1982년 26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는 사실이다. 생애 총 11개의 메이저 타이틀(역대 3위)과 62회에 이르는 통산 타이틀(역대 5위), 그리고 총 109주의 랭킹 1위(역대 5위)라는 위업을 단지 26세 이전에 거두었다는 사실은 다른 인물들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게다가 이러한 업적들은 초기에는 지미 코너스, 후기에는 존 메켄로라는 두 거물들의 협공 속에서 거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스웨덴 테니스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비욘 보그를 필두로한 스웨덴 데이비스컵 팀이 1975년 대망의 첫 우승을 기록하고 그가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연속으로 제패하자 스웨덴에서는 때아닌 테니스 붐이 일어났다. 스웨덴 테니스협회는 역사적 재정비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며 유능한 선수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매츠 빌란더와 슈테판 에드버그라는 걸출한 스타가 탄생한 배경 역시 전적으로 비욘보그의 영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보그 덕분에 스웨덴 테니스는 바야흐로 황금기를 맞게 된 것이다.
1981년 윔블던 결승과 US오픈 결승에서 존 메켄로에게 연패당한 이듬해 은퇴를 선택한(공식 은퇴발표는 1983년) 비욘보그는 ?은퇴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 라벨 그룹(Design Label Group)의 사업에 매진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스웨덴 언론의 각종 루머에 시달려야했다. 이미 18세부터 스웨덴을 떠나 소득세가 없는 모나코의 몬테카를로에 정착했었던 보그는 그동안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언론으로부터 집중추궁을 받기도 하였고 그가 이태리 밀라노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허무맹랑한 신문보도 때문에 소송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언론의 근거없는 추궁은 계속되어 나중에 그가 컴백할 당시(1991년 다시 자신의 우드라켓을 들고 컴백하였지만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에도 재산을 탕진하고 재정상의 이유 때문에 테니스를 재개한다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가 현재 스톡홀름 주변의 작은 섬 잉가로(Ingaroe)에 정착한 이유도 이러한 시달림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1980년 루마니아의 테니스 선수인 마리아나 시미오네스쿠(Mariana Simionescu)와 결혼 하여 화제였으나 2년 반의 결혼생활을 마감하고 이혼하게 되었다. 1983년엔 [지미 코너스-비욘보그의 라이벌 이벤트]에 따라 한국을 방문한 바 있으며 1987년엔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현재 왕년의 라이벌 지미 코너스, 메켄로와 함께 각종 시니어 투어를 통해서 올드팬들에게 멋진 경기를 보여주고 있다. 잘생긴 외모, 금발의 긴머리에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테니스 스타들의 패션에도 바람을 일으켰던 70년대의 비욘보그. 그는 아마도 테니스 팬들에게 오랫동안 전설중의 전설로 남을 것이다.
[박일균 필자 후기]
[테니스의 전설들]은 점점 종반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존 메켄로와 이반 랜들,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와 슈테피 그라프가 남았습니다. 원래는 슈테판 에드버그와 매츠 빌란더, 보리스 베커도 포함시켰지만 [전설]에 포함시키기 미흡한 점이 있어 삭제하였습니다. 특히 보리스 베커는 은퇴후의 부도덕한 행위(혼외정사, 탈세 등)로 [테니스의 전설들]에 등장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구요. 다음편에는 나브라틸로바, 혹은 메켄로로 이어집니다. [제6편]과 [제7편]에서 글을 남겨주신 기림님, [8편]의 이인수님, [9편]의 양승찬님, 그리고 졸작을 master piece라고 보아주신 이정우님께 감사드리며...
존 매켄로
70년대 중반부터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의 경쟁구도가 가속화될 무렵, 남자 테니스계는 또 하나의 신예 선수의 등장으로 3파전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가 바로 '코트의 반항아' 또는 '코트의 악동'으로 불리웠던 미국의 존 매켄로이다. 미국은 지미 코너스에 이어 매켄로의 등장으로 70년대 중반까지 명성을 떨쳤던 호주 테니스를 따돌리게 되었으며 두 미국인은 스웨덴의 비욘 보그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파전 테니스 전쟁을 치르게 된다.
존 매켄로(본명: John Patrick Mcenroe Jr. 1959- )
존 매켄로는 1959년 2월 16일 독일의 비스바덴(Wiesbad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독일에 주둔하고 있었던 미 공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독일 근무기간에 존 매켄로가 태어나게 된 것이며 얼마후 가족은 곧 미국으로 귀국, 어린 존 매켄로는 유년기를 뉴욕주 더글라스턴(Douglaston)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포트 워싱턴 테니스 학교에서 본격적인 테니스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고 빼어난 실력을 발휘, 차세대 미국의 기대주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처음으로 국제적 관심이 집중된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77년. 프랑스 오픈 혼합복식에서 자신의 파트너인 메리 카릴로(Mary Carillo)와 함께 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 이다. 같은해 윔블던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지미 코너스에게 4세트만에 패배), 오픈시대이후 최초로 예선통과자, 아마추어로서 준결승 진출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인 1978년 전미 대학선수권에서 우승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비로소 프로의 길을 걷게 된다. 프로 데뷔후 반년간 49승 7패를 기록했던 존 매켄로는 곧바로 데이비스컵 미국대표로 발탁되어 5년만에 미국이 데이비스컵을 차지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다른 미국 선수들보다도 국가관이 투철했던 매켄로는 이후 12년간(78-84, 87-89, 91-92)이나 데이비스컵 미국대표로 활약하게 된다.
그의 첫 메이저 단식 타이틀 획득은 79년 US오픈에서 이루어졌으며 81년까지 3년 연속, 84년에 또 한차례 US오픈 왕좌에 올랐다. 81년 윔블던 결승에서는 전년도에 이어 비욘보그와 또 한번 라이벌대결을 펼쳐 80년 결승에서 당한 한많은 패배(비욘보그편 참조)를 앙갚음하면서 윔블던 왕좌에 처음으로 오르기도 하였다. 83년과 84년에도 연속으로 윔블던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그는 윔블던 3회, US오픈 4회 우승이라는 기록(특히 US오픈의 3년연속 타이틀은 20년대 빌 틸든(Bill Tilden)이후 최초로 기록되기도 하였다.)을 남겼으며 복식을 포함, 총17개에 이르는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존 매켄로의 등장으로 73년 이후 집계된 컴퓨터 랭킹에도 지각변동이 있었다. 77년 8월부터 80년 3월까지 지미 코너스와 비욘보그가 서로 나누었던 1위의 자리를 드디어 존 매켄로가 차지면서 랭킹1위의 구도는 비욘 보그-존 매켄로로 바뀌었다. 이러한 구도는 81년까지 지속되다가 비욘 보그가 은퇴하자 랭킹1위 쟁탈전은 다시 지미 코너스-존 매켄로로 바뀌었으며 이는 83년 2월 이반 랜들(Ivan Lendl)이 1위를 차지할 때까지 계속된다. 매켄로가 기록한 총 170주 1위 달성은 지미 코너스(268주)에 이어 당시 역대 2위의 기록이었다.(후에 랜들과 샘프라스에 의해 갱신) 또한 그는 메이저 타이틀을 포함, 생애통산 77회에 이르는 싱글 타이틀을 보유하여 오픈시대 이후 지미 코너스(109회)와 이반랜들(94회)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복식을 포함(154회)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으로 역대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비욘 보그가 톱스핀의 제왕이었다면 존 매켄로의 장기는 무엇이었을까. 테니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탁월한 발리(volley)감각을 꼽는다. 스트로크중 발리 포인트를 쉽게 찾아내 환상적인 네트플레이를 선보였는데 특히 슬라이스 발리(slice volley)는 왼손잡이 선수 중 최고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훌륭한 플레이로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지만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만만치 않다. 경기에서 실력 이외에 중요한 요소로 페어 플레이를 꼽는 많은 팬들은 주심과 선심에 대한 그의 거친 매너 때문에 그를 기본적인 자질이 부족한 선수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주심을 향해 라켓을 집어 던지기도 하고 선심에게 심한 욕설을 하며 경기의 흐름을 방해하는가 하면 이러한 행위로 인해 상대 선수의 정신적 리듬까지도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코트의 악동'이라는 그의 닉네임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관중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 그의 '튀는 행동'은 그를 더욱 더 인기스타로 만들었다. 또한 상당수가 그의 투철한 애국심을 높이 사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는 테니스에 관한한 미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
그의 동생 패트릭 매켄로(Patrick Mcenroe) 또한 테니스 선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패트릭은 89년 동료 그랍(Grabb)과 함께 프랑스오픈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 있으며 1991년 시카고 대회에서는 매켄로 형제가 산체스 형제(1987년 마드리드)이후 두번째로 투어무대의 '형제간 결승'을 치른 바 있다.(존 매켄로 우승) 은퇴 후 각종 시니어 무대에서는 왕년의 스타였던 지미 코너스, 비욘 보그, 야닉 노아, 앙리 르콩트 등을 제치고 여러 차례 우승, 시들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시니어 무대에서는 2위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1999년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그는 미국의 데이비스컵 감독으로 내정, 샘프라스와 애거시를 합류시켜 '드림팀'을 구성했지만 큰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최근 어느 부동산 업계의 부호가 제시한 100만불짜리 이벤트 "존 매켄로-비너스 윌리엄스의 성대결"을 거부하며 돈으로 자존심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현재 세계 남자테니스를 움직이는 '큰 손'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각종 스포츠 뉴스의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한때 영화배우 테이텀 오닐(Tatum O'Neal)과 결혼하여 화제였으나 세 자녀를 낳은 후 이혼하였고 현재는 그의 아내 패티 매켄로와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제11편 끝]
-[8편 지미코너스]에서 오류가 있어 정정합니다.
"1991년 명예의 전당에 오른..."을 1998년으로 정정합니다.(수정했습니다.)
-12편에서는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13편에서는 이반 랜들, 14편에서는 슈테피 그라프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을 장식하려고 합니다.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여)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 테니스 선수를 꼽으라면 역시 크리스 에버트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일 것이다. 80년대 비욘 보그의 은퇴 이후 존 메켄로, 매츠 빌란더와 이반 랜들, 스테판 에드버그와 보리스 베커가 혼전 양상을 보인 남자 테니스에 반해 여자 테니스는 에버트와 나브라틸로바의 2인 전성시대가 70년대 후반부터 10년동안이나 이어졌고 이는 80년대 후반 풋내기 소녀였던 슈테피 그라프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된다. 오늘날에도 모든이들에게 '철의 여인'으로 각인되어 있는 나브라틸로바. 힝기스의 어머니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마르티나 힝기스로 지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듯 여자 테니스계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나브라틸로바. 에버트와 함께 80년대 여자 테니스 무대를 평정하며 왼손으로 '힘의 테니스'를 구사했던 그녀를 소개하고자 한다.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 1956- )
나브라틸로바는 1956년 10월 18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모든 스포츠에 능했던 그녀는 여자로서는 드물게 아이스 하키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스키에도 탁월한 감각을 지녔었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쉽게 테니스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덕택이었다. 부모님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니스협회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녀의 할머니 또한 1930년대 후반 체코의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아버지(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지도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의 천성적인 운동신경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경쟁상대로 만들지 못했다. 그녀는 주로 남자들, 성인들과 연습경기를 하면서 실력을 쌓아갔으며 8세 때 처음으로 국내 주니어 토너먼트에 참가, 준결승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녀의 탁월한 실력은 14세에 국제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빛을 발하며 급기야 16세에 이르러서는 성인들을 물리치고 체코 랭킹 1위에 오르게 된다.
그녀가 처음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끈 것은 그녀의 나이 만17세를 앞둔 1973년, 오하이오주의 아크론(Akron)에서 였다. 그녀의 첫 해외원정이었던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크리스 에버트를 만나 패하긴 했으나(6:7, 3:6) 이 시점은 앞으로 에버트와의 경쟁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듬해인 1974년 호주오픈에서는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한 바 있는 마거릿 스미스 코트를 준준결승에서 격침시켜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는 프랑스오픈 혼합복식에서 우승을 거두기도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5년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에서 각각 굴라공과 에버트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복식에서 우승(프랑스오픈)을 거두어 단식 메이저 타이틀 획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였다. 이미 73년부터 세계랭킹 5위 안에 진입했던 그녀였지만 77년까지는 메이저 대회 단식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고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단식 타이틀을 거둔 것은 1978년 윔블던 결승에서 였다. 크리스 에버트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2:6, 6:4, 7:5)을 거두면서 첫 메이저 단식 타이틀을 획득, 이때부터 그녀의 기록적인 우승행진이 계속된다.
그녀가 4대 메이저 대회에서 거둔 업적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 호주오픈: 단식 3회우승(81, 83, 85) / 복식 8회 우승(80, 82-85, 87-89)
- 프랑스오픈: 단식 2회 우승(82, 84) / 복식 7회 우승(75, 82, 84-88) / 혼복 1회 우승(74)
- 윔블던: 단식 9회 우승(78, 79, 82-87, 90) / 복식 7회 우승(76, 79, 81-84, 86) / 혼복 3회 우승 (85, 93, 95)
- US오픈: 단식 4회 우승(83-84, 86-87) / 복식 9회 우승(77-78, 80, 83-84, 86-87, 89-90) / 혼복 2회 우승(85, 87)
이처럼 그녀가 메이저 대회에서 거둔 총 18개의 단식 타이틀은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윔블던 6연속 우승, 도합 9회 우승이라는 업적은 경이로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84년에 동료 팸 슈라이버(Pam Shriver)와 함께 거둔 복식 그랜드슬램(51년 프랑크 세그만과 켄 맥그리거에 이어 두번째)도 훌륭한 업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아직까지 아무도 그녀의 기록을 넘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생애 통산 타이틀 수이다. 메이저 대회를 포함하여 단식 타이틀만 167개를 기록(2위 크리스 에버트 154개)하였을 뿐 아니라 복식까지 포함(329개)하면 2위인 크리스 에버트(189개)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있다. 이는 남여 통틀어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녀의 위대한 업적은 국가 대항전인 페드컵에서도 잘 나타난다. 1975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로서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정식으로 미국시민이 된 것은 1981년이다.)하여 미국대표로서 일곱번이나 (76, 79, 81-84, 86) 우승할 때까지 페드컵에서 그녀가 거둔 전적은 단식 20승 무패, 복식 17승 무패였다. 1997년엔 미국대표팀 감독으로서도 페드컵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그녀는 랭킹부문에서도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여 78-80년과 82-87년까지 연말랭킹 1위 고수, 총 223주 1위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후에 슈테피 그라프에 의해 갱신됨)
그녀는 그랜드슬램 달성의 논란에 휘말린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호주오픈이 당시 12월 말에 열렸기 때문인데 83년 윔블던을 시작으로 US 오픈, 호주오픈, 그리고 다음해 84년 프랑스오픈을 제패하여 [1년 내에 그랜드슬램]을 이룩, 국제 테니스 연맹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83년 프랑스오픈과 84년 말 호주오픈에서는 크리스 에버트가 우승하였기 때문에 국제 테니스계는 나브라틸로바가 [한해 그랜드슬램 달성]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공식적으로 그녀의 그랜드슬램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비록 국제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여자로서는 모린 코놀리(53년), 마거릿 스미스 코트(70년)에 이어 세번째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할 뻔한 순간이었다.
총전적 1,428승 212패, 87퍼센트의 승률을 올린 그녀는 1994년 뉴욕에서 열린 WTA 챔피언쉽에서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라 사바티니(Gabriela Sabatini)에게 패할 때까지 선수생활을 계속했으며 아직도 와일드 카드를 받고 간간히 메이저 무대(복식)에 출전하고 있다. 한때 지미 코너스와 성대결을 벌여 패하기도 하였다. 작년 2000년에 비로소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그녀는 그동안 벌어들인 상금수입만 해도 남자의 이반 랜들과 샘프라스를 뛰어 넘는 2천만불 이상을 기록, 스포츠 재벌이 되었으며 현재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Aspen)에서 살면서 왕년의 라이벌 빌리 진 킹, 크리스 에버트와 함께 미국 여자테니스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필자 후기]
-그동안 발표된
[테니스의 전설들]
을 다시 한번 훑어보니 간간히 오류(띄어쓰기, 오타 등)들이 발견되고 있군요. 잘못된 기록이나 잘못된 정보가 있다면 새로 알려드리겠지만 저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서 미세한 부분까지는 손을 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문/한글 철자법, 띄어쓰기 오류는 발견하는대로 그때그때 수정하겠습니다.
-다음 13회엔 이반 랜들이 발표될 것이고 최종회인 슈테피 그라프를 끝으로 마치겠습니다.
이반 랜들
70년대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의 라이벌 관계가 무르익고 후반에는 존 매켄로가 뛰어들어 남자 테니스의 3인 경쟁체제가 확고해질 무렵, 당시 공산권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겁없이 도전장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반 랜들이다. 랜들의 성과는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 매켄로 뿐만 아니라 80년대를 호령했던 매츠 빌란더, 슈테판 에드버그, 보리스 베커와 경쟁해야 하는 치열한 환경에서 거둔 것이었기 때문에 후세의 평가에 있어 다른 이들과는 차별화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반 랜들이 -여자테니스의 나브라틸로바와 함께-테니스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전설적 인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가 바로 동구권 출신이라는데서 증명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스포츠의 결과물이 되어버린 오픈시대 이후 사회주의국가에서 프로선수들의 활동범위는 아무래도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물론 과거에도 체코출신의 야로슬라프 드로브니(Jaroslav Drobny)가 프랑스오픈(51, 52)과 윔블던(54)을 제패한 바 있고 얀 코데스(Jan Kodes)도 프랑스오픈(70, 71)과 윔블던(73) 타이틀을 획득한 바 있다. 말하자면 체코는 전통적으로 테니스 강국이었고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세(Ilie Nastase, 72년 US오픈과 73년 프랑스오픈 제패) 또한 공산권 국가 출신으로서 이름을 날린 선수였다. 그러나 이들과 이반 랜들과 다른 점은 공산국가 출신으로서의 남다른 설움 속에서 4대 메이저 대회 19회 결승 진출, 그중 8개의 메이저 타이틀, 당시까지 최다기간 랭킹1위 보유(270주)라는 기록적인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반 랜들(Ivan Lendl, 1960- )
그는 존 매켄로가 태어난 지 1년 후인 1960년 3월 7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오스트라바(Ostrava)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올가 랜들로바(Olga Lendlova)는 체코 국내랭킹 2위까지 오른 톱클래스 테니스 선수였고 아버지 이리 랜들(Jiri Lendl) 또한 국내 정상급의 테니스 선수였다.(그의 아버지는 1990년 체코 테니스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러한 뒷배경 때문에 이반 랜들은 어려서부터 쉽게 테니스를 접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라켓을 잡은 것은 그의 나이 만 5세 때. 당시 까지도 선수생활을 하였던 어머니는 그를 어느 테니스 클럽에 등록시키고 다른 어린 선수들과 연습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테니스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기량은 날로 늘어만 갔다.
그의 나이 8세 때인 1968년. 그는 어린 눈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가장 암울했던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피폐한 경제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프라하 거리로 나온 체코시민들은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의 무차별 침공앞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자유의 선봉에 선 당서기장 두프체크는 연행되고 이 때부터 무시무시한 소련의 압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 사건이 그것이다. 소련의 정치적 압력하에서 체코국민들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라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된 이반 랜들은 체코가 자신의 전 인생을 바칠 곳이 될 수 없다고 인식, 해외로 나아가 테니스로 성공하는 외길인생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의 나이 15세에 이를 무렵, 그의 실력은 벌써 국가대표로 손색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땅한 훈련장소가 없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실내 테니스장을 이용해야했으나 인구30만의 도시에 실내 테니스장은 단 한 곳 뿐이었다. 더욱이 자신에게 배당된 시간은 일주일에 고작 1시간 뿐. 그렇지만 예정된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더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랜들은 매일 실내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낙후된 시설 속에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습뿐이었다.
18세 때인 1978년, 그는 드디어 체코 국가대표에 발탁되고 동시에 프로로 전향했다. 그가 일찍부터 프로로 전향한 이유는 체코를 떠나 자유롭게 자본주의의 선진 환경에서 테니스를 하고픈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 스포츠가 국가지상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고 자본주의 스포츠인으로 대변되는 프로 선수들에게는 지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프로를 택했던 것이다. [후에 그가 조국 체코를 등지고 미국을 택했다는(그는 85년에 조국을 떠났고 92년에 비로소 미국 시민이 되었다.) 비난이 따랐지만 그의 조국에 대한 기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체코의 국가대표로 데이비스컵 대회에 참여하였고 1980년엔 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조국 체코에 우승컵을 안겨준 이가 바로 이반 랜들이다.]
그는 프로에 뛰어든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지미 코너스, 비욘 보그, 존 매켄로와 같은 철옹성을 동구권 출신의 신출내기가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에 연말 마스터스 컵에서 준우승(우승은 비욘 보그)을 차지하면서 그의 존재가 테니스계에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다.
메이저 타이틀 획득의 꿈은 그가 여러 번 준우승을 기록한 끝에 1984년 프랑스오픈에서 이루어졌다. 84년 우승하기 까지 그는 준우승만 4회를 기록했었으므로(81년 프랑스오픈, 82, 83년 US오픈, 83년 호주오픈) 그의 첫 메이저 타이틀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후 그가 거둔 메이저 타이틀은 존 매켄로(7개)를 뛰어넘는 총 8개. 프랑스오픈 3회 우승(84, 86, 87)과 US오픈 3년연속 우승(85-87), 그리고 호주오픈 2회 우승(89, 90)이 그것이다. 그는 준우승을 포함하여 메이저 대회 단식에서 결승에 진출한 것만해도 19회에 이른다. 19회의 결승진출은 오픈 시대 이후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 존 매켄로를 능가하는 기록이 되었다. 유일하게 윔블던에서만 우승하는데 실패(86, 87년 준우승)하여 4대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모두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지 못했다.
그가 이룬 업적은 [메이저 대회 최다 결승진출] 뿐만이 아니다. 83년 2월에 처음으로 랭킹 1위에 등극한 이래 90년 8월까지 총 270주 랭킹 1위에 올라 지미 코너스(268주)를 누르고 당시까지 역대 최다 1위랭킹 보유자로 기록되었다.(후에 샘프라스에 의해 갱신됨) 특히 85년 9월부터 88년 9월까지 거둔 [158주 연속1위 달성]은 지미 코너스(160주 연속)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 또한 그는 메이저 타이틀을 포함하여 통산 94개의 싱글 타이틀(109개의 지미 코너스에 이어 역대 2위), 1279승 274패라는 총전적(지미 코너스에 이어 역대 2위)을 보유, 개인타이틀 수에서도 기록적인 선수임을 증명하였다. 톱랭커 8명이 연말의 왕중왕을 가리는 마스터스컵 대회에서도 5회 우승(81, 82, 85, 86, 87), 4회 준우승(80, 83, 84, 88)하여 이후의 샘프라스(5회 우승)와 함께 최다 왕중왕에 올랐던 사실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1985년부터 87년까지 3년 연속으로 ATP에 의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던 그는 1994년 부상이 악화되어 US오픈 참가를 끝으로 은퇴의 길을 택했다.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조국을 떠난 그는 1992년 공식적으로 미국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의 국적변경으로 인하여 한때 체코국민들로부터 [나브라틸로바와 함께 조국을 등진 인물]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한 90년대 이전,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테니스를 통하여 사회주의의 체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등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서 은퇴후 현재까지 시니어 투어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시니어 투어 대신에 현재 아마추어 골프선수로 활약하고 있는데 얼마전 미국 플로리다 주의 미니 골프투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으로는 아내 사만다(Samantha)와 다섯 자녀가 있으며 그중 4명의 딸들이 주니어 테니스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올해 2001년 비로소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이반 랜들. 테니스 팬들은 이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없지만 그는 팬들의 기억속에 전설적 인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제 13편 끝]
-예고한대로 슈테피 그라프만 남았군요. 2-3일 후에 슈테피 그라프를 최종 발표하고 그동안 참고되었던 문헌들 역시 게시할 예정입니다. 애독하고 계신 분들에게 끝까지 성원 부탁 드립니다.
슈테피 그라프(여)
1985년 윔블던 대회 남자 결승. 4세트만에 우승자가 확정되는 순간 독일 각지에서는 때아닌 도심의 경적소리가 울려퍼졌다. 1930년대에 프랑스오픈을 제패한 바 있는 폰 크람(G. von Cramm)과 헨켈(H. Henkel)이후 약 50년만에 독일국적의 메이저대회 우승자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앳된 모습의 보리스 베커(Boris Becker)였다. 윔블던에서는 최초의 독일인 우승이었으며 역대 최연소 우승, 무시드(unseeded) 우승이라는 기록과 함께였다. 베커의 윔블던 우승은 독일전역에 베커 열풍을 가져왔고 그동안 독일에서 스포츠분야 시청률 1위였던 축구를 누르고 테니스가 시청률 1위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7년 프랑스오픈 여자 결승. 31살의 '철의 여인' 나브라틸로바와 독일에서 온 18세의 소녀가 결승에 올랐다. 당시까지 약 10년간 에버트와 나브라틸로바가 메이저 무대를 양분하였기 때문에 이 독일소녀의 결승진출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첫세트 6:4로 나브라틸로바를 제압한 이 소녀는 2세트(4:6)를 잃고 3세트를 맞이하였다. 3세트도 6:6으로 팽팽한 균형이 이어졌다. 4대 메이저 대회에서는 마지막세트 타이 브레이크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타이 브레이크 없이 경기가 진행되었다. 자신의 서브게임을 지킨 독일소녀는 나브라틸로바의 서브게임을 백핸드 슬라이스로 응수하며 브레이크, 8:6으로 경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자신의 첫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이 독일소녀의 이름은 남자의 베커와 함께 독일테니스의 황금시대를 열고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여자 테니스를 주도해 나갔던 슈테피 그라프이다.
슈테피 그라프(Steffi Graf, 1969- )
슈테피 그라프(본명: 슈테파니 마리아 그라프 Stefanie Maria Graf)는 1969년 6월 14일,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와 만하임(Mannheim)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브륄(Bruehl)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엔 그의 아버지 페터 그라프(Peter Graf)가 자동차 영업과 자동차 보험, 그리고 부업으로 테니스 코치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나이 만 3세 9개월이었던 1973년 3월,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녀의 손에 테니스 라켓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실에서 의자를 네트삼아 아버지가 넘겨주는 공을 받아치는 방식으로 테니스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자네트를 넘기기는커녕 공을 라켓에 맞추는 것 조차 힘들었지만 공을 네트위로 넘기면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이 선물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사리손으로 들기도 힘든 라켓을 줄기차게 휘둘러댔다. 아버지는 슈테피가 매번 의자네트를 넘기는 수준에 이르자 곧 딸을 집근처의 테니스장으로 데려가 정기적으로 연습시켰고 이때부터 그녀의 실력은 점점 더 향상되었다.
5그녀의 나이 5세때인 1974년. 그녀는 첫 토너먼트에 참가하게 된다. 뮌헨에서 열린 7세이하 아동 테니스대회에 참가한 그녀는 1회전에서 패하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이는 어린 슈테피에게 최초의 좌절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엔 동년배의 어린 테니스선수들을 이기고 때때로 자기보다 한두살 나이가 많은 주니어 선수들을 이기면서부터 급격히 실력이 향상되기 시작한다. 어린 딸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라이멘(Leimen) 지역 테니스연맹에서 주임코치를 맡고 있던 보리스 브레스크바(Boris Breskvar)에게 연락을 취해 딸의 성장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다.(주임코치 브레스크바는 어린 소년 보리스 베커를 발견하여 지도했던 인물이다.) 슈테피의 재능에 크게 감복한 브레스크바는 슈테피에게 라이멘의 테니스시설을 이용하도록 허가하였으며 그녀는 이때부터 12세에 이르기까지 라이멘에서 지도를 받게 된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딸을 라이멘에 데려다 주었고 그녀가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테니스 교육을 받으면 그녀를 다시 학교로 데려다 주는 헌신을 보였다.
그녀는 1976년 라이멘의 바덴 테니스 센터(Baden Tennis Center)에서 보리스 베커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9세였던 보리스 베커와 7세였던 슈테피 그라프는 함께 브레스크바의 지도를 받으며 각종 주니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하이델베르크 대학 스포츠 연구센터의 케르만 라이더(Kermann Reider)교수가 테니스 천재인 이들을 5년동안 관리하였다.
이 기간동안 그라프는 국내의 각종 주니어 대회를 휩쓸었고 12세에 이르러서는 미국으로 원정을 떠나 권위있는 국제 주니어 대회 오렌지 보울(Orange Bowl)의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이미 세계의 주니어 선수들 중에서는 그녀의 적수가 없었다. 그녀는 1983년 만14세도 안된 상태에서 프로로 전향하였고 바로 프랑스오픈에 참가하여 2회전까지 진출하였다. 연말랭킹 또한 98위에 랭크, 그녀의 테니스 정복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라프는 이듬해인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의 테니스 시범경기(88년 서울올림픽부터 정식종목)에 최연소선수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따내었다. 연말랭킹도 급격히 상승하여 22위에 랭크되었다. 1985년엔 16세로 랭킹 톱텐에 진입, 연말랭킹을 6위로 마크한 그녀는 1986년 8개의 타이틀을 따내며 랭킹 3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슈테피 그라프로 불리우는 독일 소녀가 13년 연상의 철의 여인 나브라틸로바의 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내다보았고 그 꿈은 현실로 다가왔다.
앞서 설명했듯이 87년은 그녀의 첫 메이저 타이틀의 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이었던 나브라틸로바의 아성을 프랑스 오픈에서 무너뜨리면서 새롭게 등장한 그라프는 윔블던, US오픈에서 연속 준우승하면서 그녀 생애 처음으로 랭킹 1위에 올랐다. 랭킹1위에 걸맞는 성적은 88년에도 이어졌다. 그라프 생애 최고의 해인 88년에는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휩쓸며 모린코놀리(53), 마거릿 스미스 코트(70)에 이어 여자테니스 역사상 3번째로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88 서울 올림픽에서도 미모의 아르헨티나 선수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를 일축하며 금메달을 획득, 언론으로부터 골든슬램(Golden Slam)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골든슬램은 한해에 4대 메이저 대회와 올림픽을 제패하는 것을 의미하며 남녀 통틀어 현재까지 슈테피 그라프가 유일하다. 서울올림픽에서 그라프는 동료 클라우디아 코데-킬쉬(Claudia Kohde-Kilsch)와 짝을 이뤄 복식에서도 동메달(준결승에서 체코의 노보트나/수코바 조에게 패함)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그라프의 메이저 타이틀은 그녀의 나이 30세인 199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녀가 거둔 4대 메이저 대회의 단식 타이틀은 호주호픈 4회(88-90, 94), 프랑스오픈 6회(87, 88, 93, 95, 96, 99), 윔블던 7회(88, 89, 91-93, 95, 96), US오픈 5회(88, 89, 93, 95, 96) 등 총 22개로서 마거릿 스미스 코트(24개)에 이어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준우승 9회를 포함하여 메이저 대회에서만 총31회의 결승진출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녀는 생애 통산 타이틀 또한 107회를 기록, 나브라틸로바(167회), 크리스 에버트(154회)에 이어 역대 3위를 달리고 있다. 그녀의 업적은 랭킹분야에서도 탁월함을 나타내었다. 1987년 처음으로 연말랭킹 1위에 올라 90년까지 4년간 연속 1위, 91년과 92년에는 모니카 셀레스(Monica Seles)에게 1위자리를 내주었지만 93년부터 96년까지 다시 4년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그녀가 이룬 186주 연속 1위, 총377주 1위의 기록은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90년대 여자 테니스는 [그라프의 시대, 셀레스의 도전]으로 요약될 수 있다. 80년대 후반 그라프의 라이벌은 나브라틸로바였지만 90년대 초 모니카 셀레스의 등장으로 그라프-셀레스라는 새로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쟁구도를 막은 사건은 바로 93년 독일 함부르크 대회였다. 그라프와 셀레스의 라이벌 대결이 있던 날 관중 속에서 어느 괴한이 칼을 들고 갑자기 나타나 경기중 벤치에서 쉬고있는 셀레스를 피습, 등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고 진행중인 경기는 취소되었다. 부상을 입은 셀레스는 곧바로 병원에 이송되어 얼마 후 퇴원했지만 이 사건으로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받고 이후 2년간 테니스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셀레스는 2년 후 선수생활을 재개하였지만 사건이 있던 시점은 셀레스가 그라프를 꺽고 승승장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셀레스로서는 선수생활에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당시의 범인은 그라프의 광적인 팬이자 정신이상자였는데 본의아니게 셀레스에게 폐를 끼치게 된 그라프는 사건 이후 셀레스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 위로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이후 현재까지 셀레스는 독일에서 개최되는 경기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0년간 한차례도 거르지 않고 매해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던 그라프도 1997년 프랑스오픈 후 부상을 입게되어 한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97년 연말랭킹은 28위로 떨어지게 되었으나 98년 윔블던 대회에서 다시 코트에 복귀하여 전성기 때의 감각을 찾는데 성공, 톱텐에 재진입하게 된다. 그라프는 99년 프랑스 오픈에서 힝기스를 상대로 그녀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차지하였고 당해 윔블던에서도 결승까지 올랐으나 데이븐포트에게 패하였다. 99년 프랑스오픈과 윔블던 준우승으로 랭킹이 3위까지 올랐으나 그라프는 곧 은퇴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만30세를 넘겨 선수생활을 계속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슈테피 그라프를 훌륭한 테니스 선수로 키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사람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 페터 그라프였다. 하지만 그는 슈테피가 여자테니스를 평정하며 상당한 상금수입을 올리게 되자 돈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하였는데 수입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97년 정부로부터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는 이듬해 감형이 되어 풀려났지만 슈테피 그라프가 당시 아버지의 탈세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슈테피와 아버지는 결별하게 되었다.
그라프는 아버지 페터와 어머니 하이디 사이의 1남 1녀중 장녀이다. 두살 아래인 그녀의 남동생 미카엘 그라프(Michael Graf)는 카레이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남동생을 통해 알게 되어 7년간이나 사귀어 온 남자친구 미카엘 바텔스(Michael Bartels, 독일의 카레이서)와는 99년 여름에 이르러 관계를 정리하였다. 이것는 99년 프랑스오픈 이후 남자 테니스의 스타 안드레 애거시와 급격한 진전을 이룬 직후 그라프가 내린 결정이었지만 남자친구를 바꾸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새로운 연인 애거시와는 지난 가을 결혼하였으며 얼마후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현재 미국 라스베가스의 호화저택에서 애거시, 새로 태어난 아이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그라프는 자신의 수입으로 만들어진 재단을 통하여 전 세계의 불치병 아동, 기아상태에 있는 아동들을 위하여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끝]
[필자 후기]
한달간 지속되었던 [테니스의 전설들]을 드디어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셨던 독자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테니스의 전설들] 총14편을 집필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역시 시리즈물은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애당초 [테니스의 전설들]이외에 [주목해야 할 세계의 주니어 선수들], [그랜드슬램 대회의 역사] 등을 계획하고 자료까지 준비했었는데 이번 시리즈물로 집필능력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도 해야 하고 해서.. 어쨌든 긴 글을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연말 보내시고 내년 언젠가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을 남기시며 성원해주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테니스의 전설들]에 사용되었던 참고문헌을 끝으로 저는 이만….
[참고문헌]
1.신문/잡지/방송(개인소장자료)
-Bild/Sueddeutsche Zeitung 1999-2001년 테니스 관련 특집기사 모음.
-ZDF/ARD/DSF/Eurosport 테니스 경기/해설 영상 자료(녹화분).
-Deutsch 2000.3월호-2001. 11월호
2.인터넷 자료 사이트
-www.frenchopen.org
-www.tennistours.com
-www.sportsillustrated.cnn.com
-www.tenniscorner.net
-www.usatoday.com/sports/tennis/tennis.htm
-http://tennis.about.com
-www.wimbledon.com
-www.usopen.org
-www.tennisfame.org
-www.terra.com/specials/sportsicons/
3.CD 자료
-브리테니커 사전(멀티미디어판 2000 CD) 스포츠인 인명편
-Enkarta Enzyklopadie Plus 2000
[한국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출전사] 제1편(서문) - 필자:박일균
-들어가기에 앞서 ….
[한국선수중 4대 메이저 무대에서 가장 많은 승리와 역대 최고의 세계랭킹을 수립한 선수는 누구일까. 누구나 90년대에 활약한 한국의 대표적 여자선수 박성희를 떠올리겠지만 정답은 '아니오'이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의 메이저 대회 우승의 날을 염원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테니스의 메이저 대회 출전 기록을 살피는데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테니스의 전설들]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아주 우연한 기회에 작년 이형택 선수가 US오픈에서 선전하고 있을 당시의 인터넷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일간스포츠였는데 [(서울=연합뉴스)이승우 기자, 2000년 9월1일 14:23입력]의 글이었습니다. [한국테니스 메이저대회 도전사]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에서 엄청나게 잘못된 정보가 게시되었더군요. 4대 메이저대회에 모두 출전한 경력이 있는 이덕희 여사님이 1981년 US오픈 한번만 출전한 것으로 되어 있고 88년 호주오픈에 출전했던 김봉수 선수도 89년으로 되어있을 뿐 아니라 박성희 선수의 출전내용도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한겨레신문 레져스포츠부의 박원식기자도 2001년 5월 2일 이형택선수에 관한 기사에서 이덕희선수의 16강진출을 1982년이라고 잘못 표기했더군요. 한 두가지의 착오라면 모를까 한국테니스의 메이저대회 출전기록이 이렇게 엉성할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다른 관련기사를 열심히 뒤졌지만 제대로 기록된 것을 찾는데 실패했습니다. 특히 한국테니스의 전설적 인물인 이덕희씨에 대해서는 테니스 코리아 2001. 5월호의 [이달에 만난 사람-이덕희]이외엔 거의 소개된 기사들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덕희 선수가 한국최초이자 유일하게 WTA 투어에서 우승한 사실이 있다는 것과 그녀가 전세계랭킹 1위이자 메이저 타이틀 12회에 빛나는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을 꺽은 사실이 있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더구나 이덕희 선수의 14회에 이르는 메이저 무대 출전, 그중 24경기에서 10승(부전승 제외)을 올려 역대 한국선수중 메이저 대회 최다경기, 최다승을 이루었던 업적이 역사속에 묻혀져 더더욱 안타깝기만 합니다.
메이저 대회에서 한국선수들이 도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과감한 투자, 재능있는 주니어의 양성, 테니스 인구의 저변확대, 인식의 변화, 제도적 장치의 마련 등 수많은 요소가 밑받침되어야 하겠지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는 바로 잊혀졌던 한국테니스의 역사적 기록을 발굴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자라나는 주니어 선수들에게 선배들의 발자취를 거울삼아 세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우어 준다면 우리 한국테니스의 미래 또한 밝을 것입니다. 저는 이 작업이 누군가에 의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일본만해도 자국인들의 메이저대회 출전사가 정확히 정리된 것을 보고 무척 부럽더군요.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총체적인 [한국테니스의 역사]가 쓰여질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그 작은 발걸음을 시작하려 합니다. [한국테니스의 4대 메이저 대회 출전의 역사(메이저대회 예선출전은 제외)]는 그 작은 발걸음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2002 호주오픈을 앞두고 수행되는 이 작업은 한국선수들이 출전했던 모든 메이저 경기의 상세기록들을 국내 최초로 망라하고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던 한국선수들의 업적들을 새로이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기록들은 주로 국제 테니스연맹의 기록을 참고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한국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출전사] 제2편 - 필자:박일균
1900년대초 한국에 테니스가 처음으로 소개되고 현대적 개념의 론 테니스(Lawn Tennis)가 시작된 것도 약 7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해방후 조선테니스협회가 설립되고 1948년 국제 테니스연맹에 공식 가입한 이후 1953년 조선테니스협회의 후신인 대한테니스협회가 발족되면서부터 비로소 한국테니스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한국테니스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60년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 첫 출전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테니스의 해외원정은 30년전인 1970년대 초에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국제대회의 꽃'이라 할수 있는 4대 메이저대회에 한국테니스가 처음으로 진출한 때도 바로 70년대 초였다.
I. 70년대 ?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덕희, 최초의 메이저 대회 도전
70년대 초에 메이저대회에 첫발을 내딘 인물은 한국여자테니스의 간판이었던 이덕희 선수이다. 테니스에 관계하는 많은 이들은 이덕희란 이름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들은 아마도 작년 이형택선수가 US오픈 16강을 달성했을 때 각종 매체에서 "이덕희 선수이후 두번째"라는 기사, 혹은 [이덕희배 국제 주니어 대회]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덕희 선수가 만 19살 5개월의 나이로 1972년 12월 26일부터 1973년 1월1일까지 개최된 호주오픈에 -자신의 첫 국제대회(이하 국제대회라 함은 투어급 이상/페드컵을 지칭한다)이자 메이저 대회- 에 출전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한국테니스의 메이저대회 출전의 역사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덕희 선수는 또한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에서 귀중한 1승을 올려 역사적인 [한국인의 메이저대회 첫승]을 이루게 된다. 64드로로 시작된 1회전에서 호주의 팸 휘트크로스(Pam Whytcross)를 6:4, 7:5로 제압하고 2회전에 진출하게 된 이덕희 선수는 2회전 상대 카렌 크란츠케(Karen Krantzcke)를 맞아 선전하지만 3:6, 5:7로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이덕희 선수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양정순 선수와 함께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녀의 국제대회(투어급 이상)는 수년간 주로 국가대항전인 페드컵(Fed Cup)에 국한되었고 1979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선수로 등록(한국 최초의 프로선수)한 후에서야 비로소 활발한 국제경기를 갖게 된다.
II. 80년대 ?이덕희, 감격의 16강 달성 /김봉수, 한국남자 첫 메이저 대회 진출
1. 1980년
프로에 입문한 이덕희 선수는 1980년 초반부터 미국의 힐튼헤드(Hilton Head)와 이태리의 페루자(Perugia) 해외원정에 나서 연속 16강에 오르는 등 활약을 보이다가 1980년 5월 26일부터 6월 8일까지 열린 프랑스오픈에 참가하게 된다. 64드로로 시작된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독일의 클라우디아 코데-킬쉬(Claudia Kohde-Kilsch, 슈테피 그라프와 함께 88년 서울올림픽 복식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를 맞아 6:3, 7:5로 승리, 자신의 두번째 메이저 대회 승리를 기록한 이덕희 선수는 2회전에서 스위스의 페트라 델헤스-야우흐(Petra Delhees-Jauch)에게 완패(1:6, 2:6)하며 메이저대회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이덕희 선수는 다음달 열리는 윔블던 대회에도 참가했다. 128드로로 시작된 80년 윔블던은 이덕희 선수에게 1회전 부전승의 행운을 주었으나 2회전에서 미국의 렐레 포루드(Lele Forood)를 넘지 못하고 4:6, 1:6으로 패하며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계속해서 이덕희 선수는 약 두달 후 열리는 US오픈에 대비하기 위해서 곧 미국으로 원정을 떠났다. US오픈의 전초전 격인 7월 말 리치몬드(Richmond) 대회 1회전에서 그녀는 한 전설적인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은 메이저대회 18회 우승에 빛나는 철의 여인 나브라틸로바였다. 하지만 갓 프로에 입문한 이덕희 선수가 나브라틸로바를 꺽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과는 1:6, 1:6의 완패였다. 1980년 8월 26일 개막된 US오픈. 128드로로 시작된 1회전에서 이덕희 선수는 또 다시 부전승의 행운이 있었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캔디 레이놀즈(Candy Reynolds)에게 3:6, 4:6으로 패하게 된다. 얼마후 WTA 투어 푀닉스(Phoenix) 대회에서 그녀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둔다. 64드로로 시작된 비교적 규모가 큰 이 대회에서 3명의 미국 선수를 차례로 꺽고 준준결승에 오른 것이다. 이때부터 점차로 랭킹이 상승하여 10월 13일에 열린 일본 나고야 대회에서는 국제대회 최초로 시드를(7번시드) 받기도 하였다. 1980년 11월 24일. 그녀는 또다시 호주오픈에 참가했지만 1회전에서 일본의 사토 나오코(Sato Naoko)를 맞아 2:6, 3:6으로 패하며 한해를 마감하게 된다. 1980년은 이덕희 선수에겐 의미있는 한해였다. 한국인 최초로 4대 메이저 대회에 모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덕희 선수가 이미 한국의 첫 프로 테니스 선수라는 기록과 72년 12월의 첫 메이저 대회 출전이라는 기록 외에도 80년에 4대 메이저 대회에 모두 진출하는 기록을 세운 것은 바야흐로 한국테니스가 세계무대에서 활약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출전사] 제3편 - 필자:박일균
2. 1981년
4월에 열린 미국의 힐튼헤드 대회. 이덕희 선수는 1회전을 통과하고 2회전에서 테니스의 여왕 크리스 에버트(Chris Evert, 테니스의 전설들 참조)를 만났다. 그러나 전성기의 에버트를 꺽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과는 0:6, 0:6의 대패였다.
전년도에 모든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던 이덕희 선수는 1981년에는 호주오픈을 제외한 3대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5월의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는 체코의 마리아 핀테로바에게 1:6, 6:0, 1:6으로 패하게 되지만 2세트의 6:0 세트승은 한국인이 메이저 대회에서 거둔 유일한 퍼펙트 세트승이 되었다. 다음달 윔블던에서는 1회전 부전승을 거두고 2회전에서 미국의 로잘린 니드퍼(Rosalyn Nideffer)를 맞아 3:6, 1:6으로 패배, 이덕희 선수의 메이저대회 2회전 징크스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9월 1일 개막된 US오픈에서 이덕희 선수는 한국테니스사에 길이 남을 16강 신화를 창조해낸다. 1회전에서 호주의 수잔 레오(Susan Leo)선수를 6:3, 6:4로 가볍게 일축한 뒤 2회전에서 미국의 수잔 마스카린(Susan Mascarin)선수를 3세트 사투끝에 6:7, 6:4, 7:6으로 제압, 2회전 징크스를 처음으로 떨쳐내고 3회전에 진출하였다. 이덕희 선수는 3회전에서도 당시 세계적 선수로 이름날리던 루마니아의 버지니아 루치치(Virginia Ruzici,78년 프랑스오픈 우승자)를 6:1, 4:6, 7:5로 꺽고 대망의 메이저 대회 16강을 달성하며 한국테니스에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8강의 길목에서 메이저대회 4회우승, 세계랭킹 3위에 빛나는 체코(후에 호주로 국적변경)의 하나 만들리코바(Hana Mandlikova)를 맞아 1:6, 0:6으로 완패당하긴 했으나 그녀의 메이저 대회 16강 달성은 2000년 이형택 선수가 US 오픈 16강에 오를때까지 19년간 한국의 메이저대회 단독 기록으로 남게되었다. 이덕희 선수는 계속해서 10월의 토쿄대회와 11월의 홍콩대회에서도 연속 8강에 오르면서 역대 한국인이 작성한 최고의 세계랭킹인 34위를 마크하게 된다.
3. 1982년
전년도에 호주오픈을 제외한 3대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고 US오픈 16강에 올랐던 이덕희 선수는 1982년에도 한국테니스의 숙원을 풀게 된다. 1982년 1월 미국의 포트 마이어(Fort Myer) 대회에서 4명의 선수를 연달아 꺽고 결승에 진출한 이덕희 선수는 남아공의 이본 베어마크(Yvonne Vermaak) 선수를 6:0, 6:3의 완벽에 가까운 스코어로 제치고 우승트로피를 안게 된다. 이는 역대 한국선수중 최초이자 유일한 국제대회(투어급 이상) 우승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해설: 필자는 이덕희 선수의 WTA 포트마이어 대회 우승에 대한 기록을 한국의 테니스관련 기사에서 본 일이 없다. 다음의 테니스 전문 사이트로 이동하면 WTA 투어 1982년 우승자목록 첫줄에서 이덕희라는 자랑스런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http://tenniscorner.net/archives.php)]
이덕희 선수는 프랑스오픈이 시작되기 직전인 4월과 5월에 이르러 다시한번 엄청난 일을 해내고 말았다. 4월의 힐튼헤드 대회에서 메이저대회 3회(68 US오픈, 72 호주오픈, 77 윔블던) 우승자이자 전세계랭킹 2위에 빛나는 영국의 버지니아 웨이드(Virginia Wade)를 1회전에서 꺽고 2회전에서도 루마니아의 버지니아 루치치를 꺽으면서 16강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저대회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규모가 컸던 독일오픈 2회전에서도 전 세계랭킹 1위(컴퓨터 집계 이후에는 2위), 메이저대회 12회 우승에 빛나는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 '테니스의 전설들'12편 참조)을 2:6, 6:3, 6:2로 꺽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때는 빌리 진 킹이 노쇠의 경향을 보일 시기였긴 했지만 이는 역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전)세계랭킹 1위에 승리를 거두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독일오픈에서 이덕희 선수는 3회전 상대마저 제압하고 8강에 올랐다.
이덕희 선수의 1982년 메이저대회 출전은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 이루어진다.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부전승을 거둔 그녀는 2회전에서 헝가리의 안드레아 테메스바리(Andrea Temesvari)에게 0:6, 1:6이라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한달 후 열린 윔블던에서는 영국의 글리니스 콜레스(Glynis Coles)를 맞아 4:6, 6:4, 6:1로 신승을 거두고 2회전에 진출했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안드레아 예거(Andrea Jaeger)에게 6:4, 4:6, 5:7로 분패하였다. 그러나 US오픈에서는 전년도 16강달성에 이어 자신의 두번째 최고성적인 3회전까지 진출하게 된다. 1회전에서 호주의 안네 민터(Anne Minter)를 6:3, 4:6, 7:6으로 이기고 2회전에서는 미국의 캔디 레이놀즈(Candy Reynolds)를 6:3, 7:6으로 꺽었던 것이다. 3회전에 진출한 이덕희 선수는 그러나 아쉽게도 미국의 캐티 리날디-스툰켈(Kathy Rinaldi-Stunkel)을 넘지못하고 1:6, 2:6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4. 1983년
이덕희 선수는 1983년에도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 등 3대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녀는 5월에 개막된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미국의 렐레 포루드(Lele Forood)를 맞아 6:2, 6:4로 가볍게 승리를 거두며 2회전에 진출하였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파울라 스미스(Paula Smith)에 3:6, 6:1, 5:7로 분패하고 말았다. 다음달 열린 윔블던에서도 1회전 상대인 체코의 마르첼라 스쿠어스카(Marcella Skuherska)에 6:1, 4:6, 6:4로 승리를 거두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캐티 조단(Kathy Jordan)에게 1:6, 1:6으로 완패하였다. 계속해서 이덕희 선수는 81년과 82년에 그녀에게 좋은 성적을 안겨주었던 US 오픈에 참가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1회전도 통과하지 못하고(미국의 카트린 커밍스에게 1:6, 6:7 패) 결국 테니스 코트를 떠나게 된다. 이때는 그녀의 나이 만 30세였다.
이덕희 선수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4년간 프로무대에서 활동했다. 좀더 일찍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는 한국테니스의 프로진출이 여의치 않았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이덕희 선수가 한국 테니스의 첫 프로선수로서 한국 테니스계의 세계진출에 포문을 열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메이저대회 14회 출전에 2회전 이상 진출한 횟수만도 11회에 이르는, 특히 US오픈의 16강달성(81년)과 3회전 진출(82년)이라는 그녀의 업적은 [한국테니스의 4대 메이저 대회 출전사]에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스포츠가 그동안 축구와 야구, 농구 등 소위 인기종목 중심으로 활성화 되었던 상황에서 테니스의 이덕희라는 인물이 과소평가되어 왔지만 이젠 그녀의 업적이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 같다.
5. 1988년
이덕희 선수의 은퇴 이후 한국테니스의 메이저 대회 출전의 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8년 김봉수 선수가 이덕희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 한국 남자 선수로서는 첫번째로 메이저 대회 본선에 참가하는데 성공한다. 김봉수 선수는 유진선 선수와 함께 80년대 한국테니스를 주도해왔던 선수로서 한때 한국남자테니스 선수 중 최고랭킹인 세계랭킹 129위를 마크했던 인물이다. 그는 88년 1월 11일 개막된 호주오픈에 한국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출전했다. 예선을 어렵게 통과한 김봉수 선수는 1회전에서 같은 아시아권 선수인 인도의 라메쉬 크리쉬난(Ramesh Krishnan)선수를 맞았다. 1세트를 3:6으로 내준 김선수는 2세트를 6:3으로 빼앗으며 역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 첫 무대가 다소 긴장되었는지 3세트를 4:6으로 아깝게 내주고 만다. 세트 1:2로 뒤지던 김봉수 선수는 다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6:4로 4세트를 마무리지으면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세트 스코어 2:2. 양선수 모두에게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5세트를 맞이한 김봉수 선수는 4세트에서 무리하게 체력을 소진한 탓에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브레이크 당하며 4:6으로 무릎을 꿇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남자의 메이저무대 첫승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잘 싸웠으나 정말 아쉬웠던 한판이었다. 국제대회(투어급 이상)경력이라곤 주로 데이비스컵 지역예선과 서울 KAL 컵 출전이 전부인 김봉수 선수는 당해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 테니스 경기 2회전에서 프랑스의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앙리 르콩트(Henri Reconte, 88년 프랑스오픈 준우승자)를 꺽고 16강에 오를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갖춘 선수였다. 김봉수 선수는 93년과 94년 ATP투어 토쿄대회에서도 각각 패트릭 래프터(Patrick Rafter)와 리차드 크라이첵(Richard Krajicek)을 맞아 패하긴 했으나 한국선수들이 세계적 선수들을 상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한국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출전사] 제4편 - 필자:박일균
III. 90년대- 새바람을 일으킨 박성희/ 윤용일과 박성희의 메이저대회 동반 진출
88년 김봉수 선수가 호주오픈 본선에 출전한 이후 약 7년동안은 한국선수들의 메이저 무대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성희라는 재능있는 여자선수의 혜성과도 같은 등장으로 한국테니스의 메이저무대 진출에 청신호가 켜졌다. [참고: 사실 80년대에 이미 미국국적의 한국인 그레이스 킴(Grace Kim)이 호주오픈을 제외한 3대 메이저 대회에서 10회의 출전을 기록하였고 US오픈에서 두번(83, 85)이나 3회전에 진출한 성과가 있었으나 그녀의 국적이 미국이므로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미국국적의 한국인 케빈 킴(Kevin Kim, US오픈 3회-96, 99, 00-진출)과 알렉스 킴(Alex Kim, US오픈 1회-00-진출)도 같은 이유로 제외하고자 한다.]
1. 1995년
1975년생인 박성희 선수는 그녀의 나이 만18세인 1994년 초 WTA투어 오사카대회에서 예선통과자로서 8강에 진출, 준준결승에서 97년 프랑스오픈 우승자인 크로아티아의 이바 마욜리(Iva Majoli)에게 잘싸우고도(5:7, 7:6, 2:6) 아쉽게 패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국제무대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94년말 인도네시아의 수라바야(Surabaya)투어에서는 이태리의 리타 그란데(R. Grande), 대만의 왕시팅(Wang Shi Ting),독일의 페트라 베게로프(P. Begerow)를 차례로 꺽고 준결승에 진출-준결승에서 일본의 스기야마 선수에게 세트 2:1로 패함.-하는 등 메이저 무대에서 활약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예고하였다.
그녀는 다음해인 1995년 생애 처음으로 메이저무대에 도전하게 된다. 1월 16일 개최된 호주오픈에 자동출전하게 된 박성희 선수는 1회전에서 한때 세계랭킹 12위를 기록한 바 있는 조지아공화국의 레일라 메스키(Leila Meskhi)를 맞아 첫세트를 0:6으로 내주지만 2, 3세트를 연달아 7:6, 6:2로 꺽는 이변을 연출해낸다. 1983년 이덕희 선수가 윔블던 1회전에서 승리한 이후 12년만에 일구어낸 메이저 대회 승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2회전에 진출한 박성희 선수는 미국의 마리안느 베어델-비트마이어(Marianne Werdel-Witmeyer) 선수에게 5:7, 3:6으로 패하여 자신의 메이저 첫무대에서 2회전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박성희 선수는 프랑스오픈과 윔블던, US오픈에 연달아 출전하면서 80년 이덕희 선수 이후 한국선수로는 두번째로 한해에 모든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5월의 프랑스오픈에 출전하게 된 박성희 선수는 '클레이 코트의 여우'라고 불리우는 스페인의 세계적 스타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Arantxa Sanchez-Vicario)를 1회전에서 만나 1:6, 0:6으로 완패하며 1회전 탈락하고 말았다. 다음달 열린 윔블던에도 참가한 박성희 선수는 1회전에서 프랑스의 알렉산드라 퓌세(Alexandra Fusai)선수를 6:1, 6:4로 가볍게 꺽고 2회전에 진출하게 되지만 2회전에서 93년 프랑스오픈 준우승자인 미국의 마리조 페르난데스(Mary Joe Fernandez)에게 4:6, 0:6으로 패하며 메이저 대회 2회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8월의 US오픈 1회전에서는 이미 호주오픈 2회전에서 만나 패한 바 있는 미국의 마리안느 베어델-비트마이어(Marianne Werdel-Witmeyer)에게 또 다시 5:7, 6:7로 석패하고 다음해를 기약하게 된다.
US오픈 이후 벌어진 WTA 도쿄대회에서 박성희 선수는 역대 최고의 일본 선수인 다테 기미코를 세트 2:1로 꺽고 8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2. 1996년
박성희 선수는 1996년에도 4대 메이저 대회에 모두 출전하게 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2년간 연속 4대 메이저 대회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1월의 호주오픈 1회전에서 베네주엘라의 마리아 알렉산드라 벤토 캅치(Maria Alejandra Vento-Kabchi)를 6:7, 6:4, 6:4로 어렵게 이긴 박성희 선수는 2회전에서 오스트리아의 바바라 쉐트(Babara Schett)에게 4:6, 3:6으로 패하였고 5월의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는 일본의 엔도 마나(Endo Mana)선수를 맞아 5:7, 6:1, 6:3의 역전승을 거두고 2회전에 진출하였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거물급 선수인 린지 데이븐포트(Linsay Davenport)를 넘지 못하고 1:6, 2:6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달의 윔블던에서도 1회전상대인 슬로바키아의 라드카 츠루바코바(Radka Zrubakova)를 6:2, 6:2로 가볍게 꺽으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2회전에서 아미 프라찌어(Amy Frazier) 선수에게 4:6, 1:6으로 패하고 말았다. 8월의 US오픈에서 박성희 선수는 미국의 린다 와일드(Linda Wild)선수를 넘지못하고 1회전에서 탈락(2:6, 3:6)하였지만 한해 4대 메이저대회 모두 출전, 그중 3대 메이저 대회에서 2회전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3. 1997년
박성희 선수는 97년에 두개의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에만 출전하게 된 박성희 선수는 전년도의 성과에 미치지 못하고 두개의 대회에서 모두 1회전 탈락하게 된다. 호주오픈 1회전에서는 네덜란드의 브렌다 슐츠-맥카티(Brenda Schulz-McCarthy)에게 2:6, 6:2, 2:6으로 패하였고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는 프랑스의 산드린 테스투(Sandrin Testud)선수에게 0:6, 4:6으로 완패하였다. 비록 그녀가 출전한 2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1회전 탈락하였지만 박성희 선수는 점차 국제적 선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4. 1998년
97년 두개의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던 박성희 선수는 98년에는 95, 96년에 이어 세번째로 모든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주오픈과 윔블던에서는 1회전 탈락이 계속되었고 프랑스 오픈과 US오픈에서만 각각 1승씩 거두어 그다지 큰 성과는 보여주지 못했다. 호주오픈 1회전에서는 카나다의 소냐 제야셀란(Sonyaseelan)에게 7:6, 1:6, 5:7로 분패하였고 프랑스오픈에서는 1회전 상대인 이태리의 프란체스카 루비아니(Franceska Lubiani)를 맞아 첫세트를 5:7로 내주었으나 2, 3세트를 내리 6:1, 6:2로 따내며 2회전에 진출하였다. 2회전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마리아나 디아즈-올리바에게 2:6, 2:6으로 패하여 박성희의 2회전 징크스가 계속되었다. 이어서 6월의 윔블던 1회전에서는 프랑스의 줄리 알라-데뀌지(Julie Halard-Decugis)선수에게 2:6, 4:6의 패배를 당하였다. 8월의 US오픈에서는 한국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두명의 한국인이 동반 출전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이미 자동으로 출전이 확정된 박성희 선수와 더불어 윤용일 선수가 예선을 통과하여 김봉수 선수 이후 10년만에 한국 남자선수의 두번째 본선진출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윤용일 선수는 이형택 선수와 더불어 한국 남자테니스의 대들보였지만 데이비스컵 지역예선과 아시아권의 대회 이외에는 투어급 대회 경험이 거의 없었다. 윤용일 선수는 생애 처음 출전한 US오픈 1회전에서 미국의 조나단 스타크(Jonadan Stark)선수를 맞아 분전했으나 2:6, 4:6, 4:6으로 패하였고 박성희 선수는 1회전에서 체코의 렌카 네메치코바 선수에게 세트 2:1의 승리(1:6, 6:3, 6:4)를 거두고 2회전에 진출하였으나 프랑스의 나탈리 드시(Nathalie Dechy)에게 2:6, 4:6으로 발목을 잡혀 3회전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98년 한국테니스의 메이저 대회 성과는 박성희 선수의 2승이었지만 처음으로 한국남녀 테니스 선수들이 메이저 대회에 동반으로 진출한 의미있는 해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5. 1999년 99년은 박성희 선수가 1월의 호주오픈에 진출한 것이 전부였다. 1회전에서 슬로바키아의 카리나 합수도바(Karina Habsudova)에게 0:6, 7:5, 1:6로 패하며 박성희 선수의 메이저 대회 출전은 막을 내렸다. 박성희 선수의 메이저 대회 성적을 종합하면 메이저 대회 15회 출전, 20전 6승 14패의 성적으로 이덕희 선수(24경기, 10승 14패)에 이어 한국선수중 역대 2위의 메이저대회 다승을 기록하였다. 박성희 선수는 최고 세계랭킹도 57위를 기록하여 이 역시 이덕희 선수(34위)에 이어 현재까지 역대 2위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출전사] 제5편 - 필자:박일균
IV. 2000년대- 이형택의 16강 달성/ 윤용일, 조윤정의 선전
1. 2000년
2000년에 메이저 무대에 진출한 한국선수는 이형택 선수가 유일하였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김봉수, 윤용일에 이어 세번째로 메이저 무대에 진출하게 된 이형택 선수는 생애 처음으로 US오픈 본선에 참가, 한국 테니스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낸다. 지금껏 한국남자 선수들이 메이저 대회 본선에서 단 1승도 이루지 못했지만 이형택 선수는 예선전을 통해 피로한 몸을 이끌고도 3명의 세계적 선수들을 연파하며 메이저 대회 16강 달성, 한국 남자선수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한국선수의 메이저대회 16강 달성은 이덕희 선수 이후 두번째이며 남자선수로는 처음이었다.
이형택 선수는 US오픈 본선 1회전에서 미국의 제프 타랑고(Jeff Tarango)와 맞붙었다. 경기 전부터 이형택 선수의 조심스러운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상대는 당시의 이형택 선수보다 랭킹이 훨씬 앞선 80위권대였고 오랫동안 복식의 강자로 활약했던 선수였기 때문에 이형택 선수의 낙승을 점칠 수는 없었다. 또한 한국남자선수가 그동안 메이저 무대에서 한번도 승리를 거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형택 선수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첫세트를 6:3으로 선취한 이형택 선수는 두번째 세트를 3:6으로 내주고 다시 3세트를 6:3으로 따내며 승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제 한세트만 따내면 한국남자로서는 메이저무대 첫승으로 기록되는 것이었다. 4세트에 들어선 두 선수는 6:6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을 펼치다가 타이브레이크에 돌입하였으나 타이브레이크 또한 6:6까지 계속되었다. 4세트를 내주게 되면 경험면에서 월등히 앞서있던 타랑고가 5세트를 마무리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이형택 선수는 4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타이브레이크 결과는 8:6. 이형택 선수는 이로써 4세트를 7:6으로 마무리하며 한국남자테니스의 숙원이었던 메이저 무대 첫승을 달성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형택 선수의 반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회전 상대가 세계랭킹 11위의 강호이자 대회 시드 11번인 아르헨티나의 프랑코 스퀴야리(Franco Squillari)였기 때문에 한국팬들은 패하더라도 선전만 기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밖으로 작용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형택의 7:6, 7:5, 6:2 승리였기 때문이다. 당시 US오픈을 취재하던 세계의 각국 기자들은 세트 3:0으로 끝난 이형택의 2회전 승리를 대회 최대의 이변으로 꼽았으며 이형택을 인터뷰하기 위해 하나둘씩 기자회견장으로 모여들기도 하였다. 이형택 선수의 3회전 상대는 독일의 라이너 쉬틀러(Rainer Schuettler)였다. 쉬틀러 또한 세계랭킹 50, 60위권 선수였기 때문에 이형택 선수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이형택 선수는 다시한번 기적을 일구어 내며 6:2, 3:6, 6:4, 6:4로 경기를 이끌어 국내선수로는 이덕희 선수에 이어 두번째, 남자선수로는 처음으로 16강을 달성하게 된다. 이형택 선수의 네번째 상대는 설명이 필요없는 미국의 피트 샘프라스(Pete Sampras)였다. 국내 팬들은 계속된 기적을 바라기 보다는 13회의 메이저 타이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샘프라스를 상대로 이형택 선수가 얼마나 선전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더 이상의 기적은 없었지만 결과(6:7, 2:6, 4:6)에서 보듯이 첫세트를 대등하게 펼쳐 한국선수들이 톱랭커를 상대로도 해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이형택 선수는 US오픈 이후 랭킹이 급상승하여 당시 김봉수 선수가 가지고 있었던 한국 남자테니스 선수의 최고랭킹(129위) 기록을 돌파하였고 이후에도 선전을 거듭하여 100위권 내로 진입, 세계적 선수로 부상하게 되었다.
2. 2001년
2001년은 한국테니스 선수들이 비록 한번의 승리도 기록하지 못한 해였지만 메이저 무대 동반 진출이 돋보였던 해였다. 6월의 윔블던에서 이형택 선수와 윤용일 선수가 나란히 본선에 진출하였고 US오픈에서는 이형택 선수와 조윤정 선수가 동반으로 출전하였다. 전년도 US오픈 16강 달성과 영국 브링턴의 삼성오픈에서 4강에 진출하며 랭킹이 급상승한 이형택 선수는 호주오픈에 자동출전하게 되었고 1회전에서 에콰도르의 니콜라스 라펜티(Nicolas Lapentti)와 마주쳤다. 라펜티는 한때 세계랭킹이 10위권 안에 들었을 정도의 상위랭커였고 이형택 선수가 2000년 홍콩대회에서 라펜티와 한차례 만나 패한 바 있었다. 이형택의 호주오픈 1회전 경기는 5세트까지 이어졌고 결과는 6:3, 4:6, 4:6, 6:3, 6:8의 분패, 결국 전년도 US오픈의 16강 신화를 재현하려는 이형택 선수의 1회전 탈락으로 끝났다. 호주오픈 이후 이형택 선수는 세계의 유명선수들과 여러 차례 만났다. 미국의 산호세(San Jose)에서 안드레 애거시와 경기(5:7, 6:3, 3:6 패배)를 가졌고 아틀란타 대회에서는 마이클 창을 꺽기도 하였다. 미국 휴스턴의 클레이코트 챔피언쉽에서는 한국남자선수로는 처음으로 투어대회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5월의 프랑스오픈에 입성한 이형택 선수는 1회전 상대로 러시아의 전세계랭킹 1위 예프게니 카펠니코프(Yevgeny Kafelnikow)를 맞았으나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연습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기권하였다. 이에 따라 이형택 선수의 프랑스오픈 출전은 공식기록되지 않았다. 다음달에는 98년 US오픈에 윤용일, 박성희 선수가 동반 진출한 이후 두번째로 두명의 한국선수가 윔블던 본선에 진출하였다. 예선을 거친 윤용일 선수와 자동출전한 이형택 선수는 각각 러시아의 예프게니 카펠니코프와 독일의 다비드 프리노질(David Prinosil)을 1회전에서 만났으나 윤용일 선수는 4:6, 2:6, 4:6으로 패하였고 이형택 선수도 7:6, 2:6, 4:6, 4:6으로 역전패 하였다. 두명의 한국선수가 패하기는 하였으나 비교적 선전한 경기로 평가되고 있다. 8월에 열린 US오픈에서도 윔블던에 이어 두명의 한국선수가 본선진출을 이루어 냈다. 이미 최고랭킹을 60위로 끌어올린 이형택 선수는 자동출전하였고 예선을 거친 조윤정 선수의 첫 본선진출이 돋보였다. US오픈 1회전에서 프랑스의 니콜라 에스뀌드(Nicola Escude)를 상대한 이형택 선수는 2:6, 1:6, 2:6으로 완패하였고 조윤정 선수는 러시아의 기대주 엘레나 데멘티에바(Elena Dementieva)를 상대로 3:6, 5:7로 패하긴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적은 범실을 기록하는 등 선전한 경기로 평가되고 있다.
2002 호주오픈에는 이미 조윤정 선수가 와일드카드를 부여받아 출전을 확보해놓은 상태여서 한국선수의 메이저 무대 활약은 95년이후 매년 1회 이상 지속되고 있다. 이제 한국테니스는 끊임없는 메이저 대회 진출로 그 위상이 드높아져가고 있으며 언젠가 메이저 무대에서 우승하는 그날까지 세계무대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끝]
[박일균 필자 후기]
2002년 호주오픈을 앞두고 한국테니스의 역사 발굴작업의 일환으로 국내최초로 시도된 [한국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출전사]를 드디어 마칩니다. 처음에는 이덕희라는 인물만을 다루려고 했었습니다. 한국테니스에 끼친 그녀의 공적이 묻혀지는 것 같아 너무도 안타까웠기 때문이죠. 이 작업은 한국테니스 관계기관의 요청에 의해서도 아니고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수행한 작업입니다. 정보의 공유라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니만큼 위의 글이 상업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음편에서는 부록으로 한국테니스의 메이저대회 각종 기록들이 선보일 예정이며 미국국적 한국인들의 경기결과도 따로 수록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한국테니스사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작으마나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얼마 후 열리게 될 2002 호주오픈에서 한국선수이 선전하여 이글에 새로 추가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출전사] 부록 - 필자:박일균
I. 종합기록
-출전횟수: 총37회(호주오픈 9회, 프랑스오픈 8회, 윔블던 9회, US오픈 11회)
-경기수: 총57경기(호주오픈 12경기, 프랑스오픈 12경기, 윔블던 13경기, US오픈 20경기)
-승리횟수: 총20승(호주오픈 3승, 프랑스오픈 4승, 윔블던 4승, US오픈 9승)
-승률: 35%(호주오픈 25%, 프랑스오픈 33%, 윔블던 31%, US오픈 45%)
II. 개인별 기록
-대회 출전횟수:
1. 박성희 15회 출전(호주오픈 5회, 프랑스 오픈 4회, 윔블던 3회, US오픈 3회)
2. 이덕희 14회 출전(호주오픈 2회, 프랑스 오픈 4회, 윔블던 4회, US오픈 4회)
3. 이형택 4회 출전(호주오픈 1회, 윔블던 1회, US오픈 2회)
4. 윤용일 2회 출전(윔블던 1회, US오픈 1회)
5. 김봉수 1회 출전(호주오픈 1회)
5. 조윤정 1회 출전(US오픈 1회)
-전적 순위
1. 이덕희 24전 10승 14패
2. 박성희 22전 7승 15패
3. 이형택 7전 3승 4패
4. 윤용일 2전 2패
5. 김봉수, 조윤정 각각 1전 1패
-경기수 대비 승률
1. 이형택 43%
2. 이덕희 42%
3. 박성희 32%
4. 윤용일, 김봉수, 조윤정 0%
-성적별 기록
*16강-이덕희(81 US 오픈), 이형택(2000 US오픈)
*3회전 진출-이덕희(82 US오픈)
*2회전 진출-이덕희 9회(72년 12월 호주오픈/80, 82, 83 프랑스오픈/80, 81, 82, 83 윔블던/80 US오픈), 박성희 7회(95, 96 호주오픈/ 96, 98 프랑스오픈/95, 96 윔블던/98 US오픈)
*1회전 탈락-김봉수, 윤용일, 조윤정
-한해 4대메이저 대회 전출장 기록
1. 박성희 3회(1995, 1996, 1998년)
2. 이덕희 1회(1980년)
III. 메이저대회 출전 한국선수의 역대 메이저대회 우승자 상대 전적 기록
(ATP/WTA 투어, Davis/Fed 컵 포함, 챌린저급이하 제외)
1. 이덕희(16전 7승 9패)
-1977년 6월 Fed Cup-상대 버지니아 웨이드(1:6, 0:6)패
-1980년 7월 WTA 리치몬드 대회-상대 나브라틸로바(1:6, 1:6)패
-1980년 8월 WTA US 클레이 코트-상대 버지니아 루치치(0:6, 7:5, 6:8)패
-1981년 4월 WTA 힐튼헤드 대회-상대 크리스 에버트(0:6, 0:6)패
-1981년 4월 WTA 아멜리아 아일랜드 대회-상대 나브라틸로바(0:6, 1:6)패
-1981년 8월 WTA 카나다 오픈-상대 버지니아 루치치(6:2, 2:6, 6:3)승
-1981년 8월 WTA 카나다 오픈-상대 나브라틸로바(3:6, 1:6)패
-1981년 9월 US오픈-상대 버지니아 루치치(6:1, 4:6, 7:5)승
-1981년 9월 US오픈-상대 하나 만들리코바(1:6, 0:6)패
-1981년 11월 Fed Cup-상대 크리스 에버트(1:6, 3:6)패
-1982년 4월 WTA 힐튼헤드 대회-버지니아 웨이드(4:6, 6:4, 6:2)승
-1982년 4월 WTA 힐튼헤드 대회-버지니아 루치치(7:5, 4:6, 6:4)승
-1982년 5월 WTA 독일오픈-상대 빌리진 킹(2:6, 6:3, 6:2)승
-1982년 5월 WTA 루가노 대회-상대 버지니아 웨이드(6:1, 7:6)승
-1982년 5월 WTA 루가노 대회-상대 버지니아 루치치(2:6, 4:6)승
-1982년 10월 WTA 템파 대회-상대 크리스 에버트(0:6, 0:6)패
2. 김봉수(2전 2패)
-1993년 10월 ATP 도쿄 대회-상대 패트릭 래프터(4:6, 4:6)패
-1994년 11월 ATP 도쿄 대회-상대 리차드 크라이첵(4:6, 2:6)패
3. 박성희(6전 6패)
-1992년 7월 Fed Cup-상대 야나 노보트나(6:4, 2:6, 3:6)패
-1994년 2월 WTA 오사카 대회-상대 이바 마욜리(5:7, 7:6, 2:6)패
-1994년 7월 Fed Cup-상대 마리 피에르스(3:6, 1:6)패
-1995년 5월 프랑스오픈-상대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1:6, 0:6)패
-1996년 5월 프랑스오픈-상대 린지 데이븐포트(1:6, 2:6)패
-1996년 9월 WTA 토쿄 대회-상대 마리 피에르스(5:7, 2:6)패
4. 윤용일(2전 2패)
-1995년 4월 ATP 홍콩 대회-상대 짐 쿠리어(2:6, 4:6)패
-2001년 6월 윔블던-상대 예프게니 카펠니코프(4:6, 2:6, 4:6)패
5. 이형택(4전 2승 2패)
-2000년 8월 US오픈-상대 피트 샘프라스(6:7, 2:6, 4:6)패
-2000년 11월 ATP 브라이턴(삼성오픈)대회-상대 고란 이바니세비치(7:5, 6:7, 3:1)기권승
-2001년 2월 ATP 산호세 대회-상대 안드레 애거시(5:7, 6:3, 3:6)패
-2001년 4월 ATP 아틀란타 대회-상대 마이클 창(6:4, 7:6)승
6. 조윤정(1전 1패)
-2001년 10월 WTA 일본오픈-상대 모니카 셀레스(2:6, 3:6)패
IV. 미국국적의 한국인 메이저대회 경기결과
1. 그레이스 킴(Grace Kim)-메이저 대회 10회 참가
-1983년 US오픈 3회전 상대 실비아 하니카(3:6, 0:6)-결과 3회전 진출
-1984년 윔블던 2회전 상대 바바라 포터(3:6, 0:6)-결과 2회전 진출
-1984년 US오픈 2회전 상대 웬디 턴불(4:6, 6:3, 2:6)-결과 2회전 진출
-1985년 프랑스오픈 2회전 상대 슈테피 그라프(0:6, 4:6)- 결과 2회전 진출
-1985년 윔블던 1회전 상대 안네 홉스(4:6, 2:6)-결과 1회전 탈락
-1985년 US오픈 3회전 상대 크리스 에버트(0:6, 2:6)-결과 3회전 진출
-1986년 프랑스오픈 1회전상대 카타리나 린크비스트(2:6, 1:6)-결과 1회전 탈락
-1987년 프랑스오픈 1회전상대 페트라 후버(5:7, 5:7)-결과 1회전 탈락
-1987년 윔블던 1회전상대 라우라 골라싸(4:6, 1:6)-결과 1회전 탈락
-1987년 US오픈 1회전상대 이본나 쿠치진스카(4:6, 1:6)-결과 1회전 탈락
2. 케빈 킴(Kevin Kim)-메이저 대회 3회 참가
-1996년 US오픈 1회전 상대 데이빗 휘튼(3:6, 2:6, 3:6)-결과 1회전 탈락
-1999년 US오픈 1회전 상대 페르난도 멜리게니(3:6, 5:7, 1:6)-결과 1회전 탈락
-2000년 US오픈 1회전 상대 세바스티앙 그로장(3:6, 2:6, 4:6)-결과 1회전 탈락
3. 알렉스 킴(Alex Kim)-메이저 대회 1회 참가
-2000년 US오픈 1회전 상대 안드레 애거시(4:6, 2:6, 0:6)-결과: 1회전 탈락